바다의 노인, 무대의 소리꾼

간결한 상징으로 이끌어낸 최상의 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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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람 판소리 <노인과 바다>

6월 5일(토)과 6일(일), 고양어울림누리 어울림극장에서 공연되는 창작 판소리 <노인과 바다>는 이야기를 전달하는 판소리 본연의 특징에 충실한 작품이다. 소리꾼 이자람은 노인의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을 들려주며, 오늘도 치열하게 살아가는 우리를 위로한다.

새로운 국악은 현재 가장 뜨거운 장르다. 전통 판소리 <수궁가>를 재해석한 밴드 이날치와 아쟁·장구·기타로 새로운 음악을 만드는 밴드 상자루는 물론, 소리꾼 고영열과 신승태는 각각 JTBC ‘팬텀싱어’와 KBS2 ‘트롯전국체전’에서 자신들의 재능을 다른 방식으로 선보였다. 동시대의 표현 양식이 전통의 미덕을 소생시키는 중이다. 창작 판소리 <노인과 바다> 역시 마찬가지다.

무대에는 오직 이자람과 고수, 이야기뿐

하지만 이자람의 창작 판소리 <노인과 바다>에는 조금 다른 면이 있다. 앞서 언급한 아티스트들이 독특함으로 눈길을 끈다면, 이자람은 전통 양식을 고스란히 따르며 무대에 선다. <노인과 바다>에는 화려한 의상도, 다양한 악기도, 독특한 안무도 없다. 그는 단정한 한복을 입고 병풍 앞에 놓인 화문석에 오른다. 그의 곁에는 고수뿐이다.

이자람은 2007년부터 본격적으로 창작 판소리 작업을 시작했다.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 1898~1956)의 희곡에 판소리 어법와 현대적 표현 양식을 결합해 <사천가>(2007)와 <억척가>(2011)를 만들었고, 이 작품들로 전 세계를 누볐다. 그러나 이후 이자람의 작업들은 새롭다거나 대단하다는 감탄을 넘어 이야기를 전달하는 판소리의 장르적 특질에 가까워지는 방식으로 이어졌다.

© 두산아트센터

천생 어부의 삶을 이야기하는 천생 소리꾼

판소리는 소리꾼에 의해 그 이야기가 취사선택되는 예술이다. <노인과 바다>는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 1899∼1961)의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한다. 알려진 대로 소설 <노인과 바다>에는 극적인 서사가 없다. 노인은 꾸준히 바다에 나가고 별 소득 없이 돌아올 뿐이다. 그 지루함에 끌린 작가 이자람과 “고기를 잡기 위해 노인이 분주하게 생각하고 몸을 쓴다는 것, 오래 갈고닦은 기술을 바다에 펼치는 과정이 판소리와 비슷”하다고 느낀 박지혜 연출가는 이 과정에 집중해 <노인과 바다>를 만들었다.

한없이 지루해 보이는 이야기를 풀어내기 위해 소리꾼은 자신의 모든 것을 동원해 관객을 120분간 붙든다. 그것은 동시대 관객에게 익숙한 언어이기도, 애끓는 소리이기도, 소리꾼 개인의 감정이기도 하다.

공연이 시작되면 소리꾼은 쿠바의 풍경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며 관객이 상상하기를 기다린다. 매일 같이 어구를 챙겨 바다로 나가는 노인 산티아고는 85일 만에 어렵게 청새치를 잡지만, 상어에게 빼앗기고 만다. 소리꾼은 그의 싸움을 고스란히 담아내며 동시에 “나는 왜 판소리를 할까? 이 힘든 걸 왜 계속 할까?”라고 질문한다. 지루한 일상을 살아내는 노인은 무대 위의 소리꾼이자, 눈을 비비며 출근하는 우리와 닮았다.

<노인과 바다>는 노인의 이야기를 넘어 각자가 짊어진 싸움을 보여주며 모두의 이야기로 확장된다. 이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소리다. 작품에는 소리북 외에 소리를 돕는 악기와 효과가 배제되어 있다. 오로지 소리꾼의 입과 고수의 손만이 천둥과 번개를, 노인의 감정을, 시간의 변화를 만들어낸다. 관객은 소리꾼이 이끄는 대로 움직이고, 그의 말과 행동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것을 상상으로 보게 된다.

 

이자람 판소리 <노인과 바다> (MBC ‘놀면 뭐하니?’의 방구석 콘서트 中)

노인의 이야기를 넘어선 우리 모두의 이야기

혼자만의 싸움을 다룬 작품이지만, <노인과 바다>는 놀랍게도 외롭지 않다. 소리꾼은 바다 한가운데에서 노인이 느끼는 햇빛과 별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고, 같은 바다에서 각자의 사투를 벌이는 다른 어부를 떠올린다. 지친 마음을 달래는 것은 닿을 수 없는 꿈이 아니라, 자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누군가의 구체적인 마음이다.

이자람이 <노인과 바다>를 통해 전하는 메시지는 위로에 가깝다. 그는 자신의 싸움을 솔직하게 보여주고, 각자의 치열함에 귀 기울인다. 여기에는 거창한 감탄도, 비탄이나 시기도 없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평범한 일상을 받아들이고 그 안의 숭고함을 발견하는 것에 가깝다. 이자람의 창작 판소리는 증명한다. 판소리는 ‘전통’이라는 이름 아래 오래도록 잠 들어 있는 것이 아닌, 현재진행형의 음악임을 말이다.

글. 장경진(공연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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