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결한 상징으로 이끌어낸 최상의 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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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연출로 다시 만나는 오페라 ①
빌리 데커 연출의 베르디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오페라에 현대적이고 도전적인 연출이 필요한 이유는 아무리 잘 알려진 고전이라 하더라도 새로운 관점과 해석을 통해 관객에게 신선한 정서적, 시각적 감흥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음악은 같지만 마치 다른 작품을 보는 것 같은 흥미진진한 느낌이 든다면 성공한 연출이다. ‘오페라 중의 오페라’라는 <라 트라비아타>를 상징적 장치 몇 개만으로 연출해 최상의 집중력과 감동을 이끌어낸 빌리 데커의 프로덕션도 그중 하나다.

가련한 사교계 여인의 이야기,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

주세페 베르디(Giuseppe Verdi, 1813~1901)의 <라 트라비아타>(1853)는 1840년대 파리를 배경으로 한 어느 가련한 ‘코르티잔’(courtesan)의 이야기다. 코르티잔은 흔히 ‘창녀’로 번역되지만 당시 프랑스에서 유행한 개념은 좀 달랐다.

창녀와 달리 그들은 아무 남자하고나 하룻밤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의식주 일체를 호사스럽게 제공하는 부유한 귀족 또는 부르주아 남자에게만 사랑을 주었다. 또 정부(情婦)와 달리 숨겨놓은 여인이 아니라 남자의 아내도 인지하고 있는 공개적 애인으로, 공연장을 비롯한 공공장소에도 함께 다녔다.

이를테면 남자 입장에서 코르티잔의 존재는 “내가 이 정도 여자를 애인으로 둔 사람이야!”라는 자랑거리였다. 남자는 코르티잔을 평생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드는 동안만 후원했다. 후원이 끊긴 코르티잔은 다른 후원자를 찾아야 하고, 아름다움이 사라질 나이(보통 20대 중반)가 되면 무대를 떠나야 했다.

<라 트라비아타>의 주인공 비올레타는 파리에서 가장 인기 있는 코르티잔이다. 그런데 폐병으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운명이기도 하다. 그런 그녀 앞에 알프레도라는 청년이 나타나 사랑을 고백한다. 그는 시골 귀족의 아들이지만 아직 받은 재산이 없어 비올레타를 후원할 경제적 능력이 없다. 그런데도 비올레타는 기존 후원자 대신 알프레도를 받아들인다.

그러자 알프레도의 부친 제르몽이 비올레타를 찾아가 아들과 헤어져 달라고 요구한다. 비올레타는 자신이 알프레도의 창창한 미래에 장애가 된다는 점을 인정하고, 이유도 말하지 못한 채 알프레도 곁을 떠나 파리 사교계로 복귀한다.

비올레타가 떠난 이유를 모르는 알프레도는 수많은 사람이 모인 파티장을 찾아가 공개적으로 그녀를 모욕하는 것으로 보복한다. 이 사건은 비올레타에게 치명적인 정신적 충격을 안기고, 그녀의 건강은 더 빨리 악화된다. 뒤늦게 죽음의 병상으로 달려와 용서를 비는 알프레도와 제르몽 앞에서 비올레타는 숨을 거둔다.

2005년 잘츠부르크 여름 페스티벌 <라 트라비아타>의 테너 롤란도 비야손과 소프라노 안나 네트렙코

간결한 방식의 강렬한 감동,
빌리 데커의 연출

독일 연출가 빌리 데커(Willy Decker, 1950~ )는 손대는 작품마다 호평을 받는 스타 연출가는 아니지만 <라 트라비아타>만큼은 공전의 대히트를 쳤다. 2005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무대에 오른 이후 큰 호평을 받았고,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도 그의 연출을 채택했다.

비결은 기본적 장치에 강렬한 의미를 부여하여 가장 간결한 방식으로 이 오페라가 지닌 감동을 극대화한 덕분이다. 빌리 데커는 ‘죽음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한 여인, 그녀에게 찾아온 뒤늦은 사랑’을 상징화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1막 : 시계, 노인, 그리고 붉은색

공연은 내내 하얀 벽체가 둥글게 둘러싼 고정된 무대로 일관하는데, 1막 전주곡이 연주될 때 이미 막이 올라가 있다. 무대 오른편에 거대한 시계가 벽면에 걸쳐 있고 그 앞에는 웬 노인이 앉아 있다. 왼편 문이 열리더니 빨간 드레스와 빨간 구두의 비올레타가 나타나 노인에게 뭔가 애원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구두를 벗는다.

시끌벅적한 1막이 시작되어 수많은 남자들이 비올레타 앞으로 몰려들면 그녀는 난감한 표정으로 다시 빨간 구두를 신고 그들 앞에 나선다. 여기서 시계는 죽음의 상징이요, 붉은색은 화류계 생활의 상징이다.

원래 유럽 문화에서는 네덜란드 화가들이 정물화에 그렸듯이 모래시계가 죽음의 상징이다. 그런데 근대적 시계로 바뀐 다음에도 그 의미가 남았다. 시계는 특히 스웨덴 영화감독 잉마르 베리만(Ingmar Bergman, 1918~2007)이 죽음의 예고로 자주 이용했던 오브제로 유명하다.

죽는 시간은 예고되지 않으므로 시계 바늘이 멈추는 때에 죽는 것이고 그것이 언제가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따라서 바늘이 있는 시계가 오히려 모래시계보다 죽음에 더 잘 어울려 보이기도 한다. 모래시계는 언제 종료될지 정해져 있지 않은가.

그러면 노인은 누구일까. 대본에 없는 묵역(黙役)인데, 어두운 전조가 떠오를 때마다 비올레타 앞에 반복하여 나타나므로 죽음의 사신처럼 보인다.

3막에서야 그 노인은 바로 비올레타의 주치의임이 밝혀진다. 연출자는 주치의야말로 비올레타의 상태를 계속 관찰했으리란 의미를 부여하고 죽음의 경고자로서 극의 처음부터 등장시킨 것이다. 한편으로는 세상을 오래 산 현자의 이미지도 풍긴다. 정말 예리한 해석이고 극의 긴장감을 효과적으로 고조시키는 장치다.

한편, 비올레타의 붉은색이 화류계를 나타내는 이유는 성모 마리아를 상징하는 푸른색과 대비되는 색이기 때문이다. 이교도의 색깔로 간주되던 붉은색이 이 작품에서는 그 의미가 확장되어 타락을 상징하고 있다. 비올레타가 노인 앞에서 빨간 구두를 벗는 것은 이 생활을 벗어나고 싶으니 도와달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문이 열리면서 남자들이 쏟아져 들어오자 어쩔 수 없이 다시 신발을 신는다. 그녀에게 코르티잔은 벗어날 수 없는 숙명이다.

1막 1장의 커다란 시계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비올레타의 운명을 상징한다.

 

2막 2장의 시계가 무대 중앙에 반쯤 눕혀졌다.

 

3막에서는 바닥에 완전히 눕혀진 시계에 죽음을 앞둔 비올레타가 앉아 있다.
(2005년 잘츠부르크 여름 페스티벌 실황 갈무리)

 

2막 : 색색의 천, 색색의 가운

2막이 시작된다. 비올레타와 알프레도가 파리를 떠나 시골에서 몇달째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다. 빌리 데커는 알프레도의 독백조 아리아인 「불같은 젊음의 혈기」를 비올레타와의 숨바꼭질 놀이 장면으로 연출한다. 알록달록한 색감의 천이 소파를 뒤덮는데, 역시 색색의 가운을 입고 그 사이를 뛰어다니며 몸을 숨기는 비올레타는 굉장히 밝은 표정으로 바뀌어 있다.

색색의 천은 소파만 덮고 있는 것이 아니다. 여전히 벽에 놓인 거대한 시계를 뒤덮고 있다. 사랑의 환희가 죽음의 그림자를 압도하고 있다는 의미다. 그러나 알프레도의 부친 제르몽에게 이별을 강요당한 비올레타가 어쩔 수 없이 물러설 것을 결심하면서 스스로 천을 거두어내고, 언제 바늘이 멈출지 모르는 시계는 다시 불길한 모습을 드러낸다.

비올레타는 색색의 가운도 벗고 벽에 걸어두었던 붉은 드레스로 갈아입는다. 붉은 드레스의 그녀가 돌아갈 곳은 화류계밖에 없는 것이다. 과연 죽음의 상징인 시계와 색채의 분위기만으로 극의 긴장감과 의미를 충분히 끌어올리지 않았는가.

비올레타가 알프레도 곁을 떠나면서 다시 파리 화류계가 무대인 2막 2장에 가면, 시계가 벽면에서 내려와 무대 중앙에 반쯤 눕혀져 있다. 비올레타의 건강이 더 나빠져 있다는 것, 매우 위태로운 상황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비올레타의 진심을 모르는 알프레도가 그녀를 눕혀진 시계 위로 내동댕이친다. 그러고는 쓰러진 비올레타를 향해 빚진 것을 갚겠다면서 마치 창녀에게 화대를 지급하듯이 돈다발을 던지고, 그것도 모자라 가슴과 입에 돈을 우겨 넣는다.

이제 관객들 누구나 깨닫는다. 비올레타를 더 이른 죽음으로 내몬 것은 바로 이 남자임을 말이다. 빌리 데커는 비올레타에게 이처럼 극도의 모욕적이고 비참한 상황을 연출함으로써 3막의 진짜 죽음보다도 더 큰 슬픔과 충격을 안겨준다.

이탈리아 오페라에서는 중요한 장면이 끝날 때마다, 특히 막이 끝날 때에는 관객들이 큰 박수로 화답하는 것이 상식이자 예의이지만, 2005년 공연 실황에서는 객석의 누구도 박수를 치지 못한다. 너무나 슬프고 충격적인 분위기에 압도당했기에, 이 장면에 박수를 치는 것이 아주 어색해진 상황이다.

비올레타는 다시 붉은 드레스를 벗어던지고 흰 속옷 상태로 주치의 앞에 쓰러지는데, 여기서 흰 속옷은 화류계에서 벗어난다는 것이 아니라 죽음의 침대로 향할 차례라는 암시가 된다.

2005년 잘츠부르크 여름 페스티벌 <라 트라비아타> 실황. 비올레타와 알프레도의 행복한 시절이다.

 

3막 : 고장 난 시계

마지막 3막에서는 시계가 마치 고장 나 버려진 듯 완전히 바닥에 눕혀져 있다. 비올레타의 죽음이 멀지 않았다는 의미다. 대본상으로는 처음 등장하는 의사(이 공연에서는 전주곡 시점부터 여러 번 등장한 노인)가 도착하여 비올레타에게 어제보다 나아졌다고 말한다. 그러고는 하녀에게 얼마 남지 않았으니 준비하라고 이른다. 관객들은 그제야 노인이 바로 주치의임을 알게 된다.

 

2005년 잘츠부르크 여름 페스티벌 <라 트라비아타> 실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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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연 무대인 2005년 잘츠부르크 여름페스티벌 실황이다. 당시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던 러시아 소프라노 안나 네트렙코(Anna Netrebko, 1971~ )와 멕시코 테너 롤란도 비야손(Rolando Villazón, 1972~ )이 압도적인 노래를 들려준다. 연기도 훌륭한데, 이것은 연출자의 지시를 따른 것이 아니라 두 성악가의 열정 덕분이다. 사실 빌리 데커가 워낙 설정을 잘 해놓았기 때문에 가수들은 자기 개성을 충분히 살려 연기하더라도 연출의 콘셉트를 유지하는 데 큰 문제가 없었다. 제르몽 역의 미국 바리톤 토머스 햄슨(Thomas Hampson, 1955~ )도 특유의 미성으로 악역이 아닌 부드러운 아버지상을 창조해냈다.

글. 유형종(음악·무용 칼럼니스트)
사진 제공. 유니버설 뮤직

‘명연출로 다시 만나는 오페라’는 현대적이고 도전적인 연출로 관객들에게 신선한 감흥을 안겨준 오페라 프로덕션을 유형종 칼럼니스트가 엄선해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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