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집, 기억의 공간

소박함 속의 짙은 감동, 진짜 삶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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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죽음의 집> 리뷰

2021년 고양문화재단 새라새ON 시리즈의 첫 작품으로 공연(4.30.~5.2. 고양아람누리 새라새극장)된 연극 <죽음의 집>은, 자신들이 죽은 존재임을 입증하려는 한쪽과 그들이 죽지 않았음을 지속적으로 반증하려는 다른 한쪽이 엮어내는 오해와 이해로 점철된다. 삶은 어디까지인가. 그리고 죽음은 어디서부터인가. 삶의 종료가 죽음의 조건이라면, 그렇다면 삶은 대체 무엇을 조건으로 삼는 것일까.

분리할 수 없는 어떠한 경계, 그 흔들림

주인공 황상호가 친구 이동욱에게 자신이 죽은 존재임을 고백할 때쯤, 무대 위의 흰 벽면을 비춘 조명은 여러 겹의 형광빛으로 변한다. 붉고 푸른 양극단의 지점, 그 사이에서 나란히 포개어진 서로 다른 빛의 층위는 인물들의 그림자를 예민하게 좇는다. 삶 혹은 죽음, 존재 혹은 소멸, 있음 혹은 없음의 이원적 상태에서 벗어난 자들의 정체성이란 ‘죽은 듯 살아가는’ 혹은 ‘살아있는 듯 죽어버린’이라는 비유를 통해서만 획득될 수 있는 무형의 스펙트럼에 가까운 것 아닐까.

<죽음의 집>은 감각되지만 분리할 수 없는 어떠한 경계, 그 흔들림에 대한 이야기이다. 또한 바로 그 경계가 각인된 서로 다른 몸들이 만들어내는 관계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며, 더 나아가 그와 같은 비유의 궁극에 위치한 ‘기억’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2021년 고양문화재단 새라새ON 시리즈의 첫 작품으로 공연된 연극 <죽음의 집>(작: 윤영선·윤성호, 연출: 윤성호)은 제41회 서울연극제에서 희곡상과 연출상을 수상하며 관객과 평단의 호평을 받은 바 있다. 특히 부친인 윤영선 작가가 남긴 미완성 유고를 아들인 윤성호 작가가 매듭짓고 작품의 연출까지도 맡았다는 점에서 공연계의 이슈가 되기도 했다.

연극 <죽음의 집>. 공연 초반 제거되었던 시계 배터리는 마지막에 다시 끼워진다.

삶은 어디까지이며, 죽음은 어디서부터인가

<죽음의 집>의 진행 과정은 분명 지금, 여기에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죽었다고 주장하는 인물들(황상호와 황상호의 친구 박영권, 그리고 박영권의 아내 강문실)과 그런 그들의 죽음을 믿지 못하는 인물(황상호의 또 다른 친구 이동욱)이 엮어내는 오해와 이해로 점철된다.

자신들이 죽은 존재임을 입증하려는 한쪽의 주장과 그들이 죽지 않았음을 지속적으로 반증하려는 다른 한쪽의 시도는 집의 안팎을 오가는 인물들의 동선을 따라 교차하다가 어느 순간 등장하는 그들의 격렬한 춤을 기점으로 급격히 전환된다. 전환 후에는 이전과 다름없이 여전히 자신이 죽었다고 주장하는 인물들과 (죽었는지 살았는지의 여부를 넘어서서) 그들이 누군지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인물들로 나뉜다. 이 지점에서 관객은 자연스레 ‘망각으로서의 죽음’과 ‘기억의 저장고로서의 집’에 대해 떠올리게 된다.

이 작품의 희곡은 흥미롭게도 부조리극을 표방하고 있는데, 그런 만큼 인물의 행동과 대사로부터 인과관계를 탈락시킴으로써 역으로 행동과 대사의 밀도를 높이는 작법을 시도한다. ‘왜’에 대한 유추의 지점이 ‘그저 그러한 것’의 상태가 지배하는 표리로 대체될 때, 장면의 연쇄로 향하던 관객의 주목이 특정 조명과 특정 사운드와 특정 단어에 대한 관객의 감각으로 대체될 때, 공연을 지배하는 정서란 감동보다는 오히려 공감에 가까워진다.

그런 점에서 <죽음의 집>에는 의미 없는 듯 무심히 흘러가는 인물들의 지금이 있고, 그들이 지금 속에서 내뱉는 모순되거나 그리 모순되지 않는 말이 있으며, 그러한 말들이 즉각적으로 불러일으키는 공감의 정서가 있다.

살아 있지만 언제부턴가 나는 죽어 있었노라는 등장인물의 고백 속에서, 공연 초반에 제거되는 시계 배터리로 인해 물리적으로는 더 이상 측량 불가능함에도 분명 <죽음의 집>에 흐르고 있는 무정형의 시간성 속에서, 관객은 저마다 죽기 전엔 경험할 수 없다는 죽음의 모순을, 그리고 사는 것이야말로 죽음만큼 두렵고 감당하기 힘든 것이라는 삶의 모순을 마주한다. 삶은 어디까지인가. 그리고 죽음은 어디서부터인가. 삶의 종료가 죽음의 조건이라면, 그렇다면 삶은 대체 무엇을 조건으로 삼는 것일까.

연극 <죽음의 집> ⓒ Fotobee 양동민

기억의 공간과도 같은 <죽음의 집>

이 지점에서 삶의 조건으로 호출되는, 혹은 삶을 매개하는 ‘기억’에 대해 떠올려 본다. 황상호는 자신이 집으로 초대한 친구 이동욱을 극의 초반부터 집 안에 머물도록 집요하게 설득하는데, 이는 어쩌면 춤 장면 이후, 즉 극 전반의 트랜지션(transition) 이후에 새로이 밝혀지는 극의 조건을 암시하는 전조라 할 수 있다: 집을 벗어나면 아무도 그를 기억하지 못하며, 그것은 곧 그가 ‘최종적으로’ 죽게 되었음을 뜻한다. 마치 컴퓨터 메모리에 저장되어 있던 프로그램 모두를 삭제하고 새로이 포맷을 감행하듯이, 집을 벗어나는 순간에 관계라는 존재의 망은 제거되고 기억은 관계 이전의 태초의 상태로 리셋(reset)되는 것이다.

리셋되는 매일의 일상과 말과 관계는 가변적이기에 언제든 잊거나 잊힐 수 있다. 어쩌면 주인공 황상호 역시, 살아 있기에 삶과 죽음을 혼동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친구 이동욱의 기억에서 삭제되지 않기 위해, 기억의 공간과도 같은 <죽음의 집> 문지방을 아주 오랫동안 넘지 못했던 것 아닐까.

공연 마지막에 이르러 배터리가 끼워진 시계는 다시금 벽에 부착되고, 죽은 친구들은 모두 집을 떠나며, 유일하게 살아있던 자 이동욱은 친구들과의 게임에서 ‘죽는다’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올 때마다 마시기로 했던 위스키 한 모금을 기꺼이 입속으로 털어 넣은 채 재킷을 들고 마지막으로 집을 나선다. 이제 아무도 남지 않은 <죽음의 집>에는 황상호가 집을 떠나며 이동욱에게 건넸던 말이 기억의 흔적으로 남아 시계 초침의 리듬을 따라 흐르고 또 흐른다.

“그래도 산 사람은 살아야지.”

글. 손옥주(공연학자)
사진제공. 서울연극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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