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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년 만에 다시 <구보氏와 경성사람들>을 보다

자기만의 자장(磁場)을 형성한 동시대 연극인들을 주목하는 프로젝트, 2018 새라새 스테이지. 그 첫 번째 작품인 성기웅의 <소설가 구보氏와 경성사람들>이 지난 10월 10일부터 13일까지 공연되었다. 식민지 시대 예술가의 첨예한 고뇌를 다루는 ‘구보씨’ 연작의 시작점이기도 한 <소설가 구보氏와 경성사람들>은 이번이 11년 만의 재공연이기에 더욱 의미가 있었다. 11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젊은 연극 <소설가 구보氏와 경성사람들>, 그리고 여전히 젊은 연극인인 성기웅에 대해 생각해본다. [편집자주]

가려진 시공간을 들추며 나타난

암울한 분위기 속에서도 근대화에 적극적이었던 1930년대 경성의 ‘모던보이’와 ‘모던걸’

명동예술극장 재개관이 2009년이요 연극 전용 소극장 두 곳을 갖춘 재단법인 국립극단 출범이 2010년이니, 성기웅이 이끄는 극단 제12언어연극스튜디오가 <소설가 구보氏와 경성사람들>의 초연을 올린 2007년에는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이 연극을 올리기에 참으로 적당한 극장이었다. 당시 공공극장이 연극을 기획 제작하는 경우가 드물었고 기존 극단들이 왕성하게 활동하던 시기라, 30대 초반 성기웅을 비롯한 단원들에게 최고 수준의 무대 환경에 제작비를 전폭 지원하는‘예술의전당 자유젊은연극시리즈’당선은 필히 쾌재를 부를 성과였으리라 본다.

해도 그럴 것이 당시 선정 과정을 복기해보면 응모작 26편 가운데 1차 서류심사를 통해 5작품을 선정한 후, 2차로 작품 당 1시간 정도의 실연심사를 거치고서야 최종작을 뽑았다고 하니 여간 치열한 게 아니었던 게다. 앞서 박근형, 서재형, 김태웅 연출 등 한국연극의 거목을 발굴한 예술의전당 심사위원들이 방망이 깎는 노인마냥 심사숙고한 덕에 한국연극은 전무후무한 경성 연극의 시작을 알리게 된다. 이후 두산아트센터의 기획, 제작으로 <깃븐우리절믄날>(2008), <소설가 구보씨의 1일>(2010), <20세기 건담기>(2017)까지 영국의 셜록 홈스 만큼이나 매력적인 캐릭터인 구보와 이상을 중심으로 당시 예술가들의 삶과 경성사람들의 일상이 무대에서 환히 빛을 발했다.

경성 연극 시리즈를 통해 1930년대 모던한 신문물과 종래의 전통문화가 뒤섞여 충돌하며 빚어내는 경성의 시대상과 생활상을 명랑하게 그렸다는 평가는 단순히 연극적 성과에만 그치지 않는다. 당시 소설을 보면 아예 일제강점기를 다루지 않거나, 다룬다고 해도 대부분 일제의 억압과 핍박 받는 민중을 소재로 삼고 있다. 일제강점기를 밝게 다뤘다간 식민지 지배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오해를 받을 여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여 일제로부터 ‘제7의 도시’라는 비아냥거림(일본의 7번째 도시 수준이라는 뜻)을 들을망정 근대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경성의 ‘모던보이’나‘모던걸’을 주목한 성기웅으로 인해 1930년대는 건너뛰어야 할 암흑기에서 비로소 총천연색 얼굴을 드러내게 된다.

*벨 에포크 belle époque, ‘아름다운 시절’이라는 뜻의 프랑스어. 사회·경제적 쇠퇴와 핍박 속에서 문화예술은 오히려 낙천적으로 번성하던 현상을 의미함. [편집자주]

여전히 젊은 연극인인 까닭

일제강점기를 밝게 다루는 것은 식민지 지배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아니냐는 오해를 받을 수도 있었지만,
성기웅의 선택으로 1930년대는 비로소 총천연색 얼굴을 드러내게 되었다

극작가, 번역가, 연출가이자 교수로 그간 성기웅이 이룬 성과가 수두룩하니, ‘2018 새라새 스테이지 : 젊은 연극인 시리즈’라는 타이틀을 두고 성기웅 스스로는 ‘그러는 동안 저는 속절없이 나이를 많이 먹고 말았지만,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달았다며 쑥스러워 한다. 하지만 ‘연극계 주류에서 반걸음 쯤 떨어진 곳에 서서 경계를 탐색하는 예술인’이라는 평가를 생각해보더라도 성기웅은 포스트모던 연극, 멀티미디어 텍스트, 다윈예술 등으로 설명 가능한 학구파이자 노력파로 누구보다 앞선 21세기 연극인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성기웅은 어디 싸움이 났다 하면 구보처럼 옆에서 취재노트를 꺼내들고 세세하게 묘사하기 바빴으면 바빴지, 당최 삿대질 한번 겨뤄본 적 없을성싶다. 허나 2007년 초연 당시로 거슬러 가보면 그렇지도 않았다. 2007년 11월 1일자, 연합뉴스 인터뷰 기사에서는 서두부터 “정서 과잉’에 빠지거나 주제를 지나치게 강요하는 기존 대학로 연극에서 벗어나 새로운 연극을 하고 싶습니다.”라고 내지르고 있다. 연극에 발을 들인지 몇 년 안 된 신인이 내린 진단이 듣는 이에 따라서는 꽤 당돌했을 것이다. 더해 “이런 것에서 벗어나 지적이고, 세련되고, 자연스러운 감동을 주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고 기사를 마무리 지었으니 졸지에 무식하고 촌스럽고 억지스러운 연극을 한 셈이 된 몇몇이 그를 곱게 볼 리가 만무하다.

2007년 <소설가 구보氏와 경성사람들>의 성공 이후 그의 여정을 보면 척척 기회를 얻어 순조롭게 승승장구한 듯 보이나 2014년 《공연과 이론》(통권 53호)을 통해 윗세대 평론가들이나 선배 배우들로부터 ‘연기 사이즈가 작다’ ‘배우들의 존재감이 안 느껴진다’ ‘연극 예술의 가치를 보잘 것 없는 일상의 차원으로 스스로 끌어내리고 있다’ ‘그런 연기는 TV드라마 카메라 앞에서 하라’는 등의 비난을 들었다고 서운함을 토로하기도 했다.

제11언어, 시절이 하 수상하여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밤 늦도록 소설을 쓰는 구보(위)와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경성사람들(아래)

성기웅이 자신의 극단 이름을 ‘제12언어연극스튜디오’로 지은 까닭이 전 세계에서 한국어를 사용하는 인구 수가 대략 12번째라는 통계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데, 올해로 창단 12주년을 맞는 2018년에 극단 명을 바꿔야 할지 모를 경천동지한 일이 벌어졌다. 얼핏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단체 뉘앙스를 풍기는 ‘방탄소년단’이라는 모던보이그룹이 칼날 군무를 곁들인 노랫가락으로 세상을 온통 뒤흔드는 중인데 미국이며 구라파며 가는 나라마다 ‘얼쑤 좋다’ ‘지화자 좋다’ ‘덩기덕 쿵더러러 얼쑤’ 등 우리말 추임새를 몇 만 명이 떼창으로 따라 불러 요즘 연일 화제를 모으고 있다. 방탄소년단 팬들 덕에 전 세계 남녀노소 한국어 배우기 열풍이 분다니 다시 통계를 내보면 순위가 11위로 바뀔 지도 모를 일이다.

제11언어라, 세월이 흘렀고 시절이 달라졌다. <소설가 구보氏와 경성사람들> 초연 이후 11년 동안 구보 역의 김종태를 비롯해 선종남, 백현주, 우돈기, 이화룡 배우 등은 크고 작은 무대며 영화, 드라마에서 활동하는 배우로 꾸준하다. 이번 재공연에서 에피소드 ‘진통’이 통째로 빠져 섭섭해 할 이발소 소년 재봉 역의 마두영 배우도 막내뻘에서 어느새 연기자이자 연출가로 올해 제39회 서울연극제에 자신의 연출작을 올렸다. 재공연에 그 시절 배우들이 보이지 않아 아쉽기도 하지만, 성기웅이 말하길 구보 연작 중에 이번 프로덕션이 가장 젊다고, 그래서 젊은 연극인 시리즈에 어울린다고 하니 뭐, 그 말도 맞구나 싶어 호기심이 간다.

1933년 당시 스물 서넛이었던 박태원보다 몇 살 많은 구보 역의 강희제 배우는 호기심 가득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대문짝만하게 얼굴 한가득 나오게 포스터 사진을 박았는데 역시나 팽팽하니 주름 한 줄 안 보인다. 다른 이들도 꽤 동안이다 싶다만 최건우와 한새롬 배우가 이번이 데뷔작이다. <소설가 구보氏와 경성사람들>은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초연에 한 해 앞서 성기웅이 2006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전문사 졸업공연으로 올렸던 작품이다. 학생 시절을 마무리했던 작품을 연극연기학과 교수가 되어 제자들을 위한 학교 워크숍 공연으로, 후배의 첫걸음을 열어주는 무대로 올리며 작품이 선순환하고 있는 경우이다.

구보는 구보, 기웅은 기웅

10월 13일(토) 2시 공연 후 이뤄진 관객과의 대화. 왼쪽부터 김창훈 프로듀서(고양문화재단), 성기웅 연출, 박재영 선생(구보 박태원의 차남)

성기웅이 강희제 배우와 비슷한 나이였을 시절, 군 제대 후 연세대학교 국문학과 학생 신분으로 1년간 도쿄 외국어대에 교환학생으로 갔을 때 일본인들이 국문학 전공인 자신도 잘 모르는 월북작가 박태원(월북문인의 해방이전 작품 공식해금 조치, 1988년)의 작품을 분석하는 비교문학 세미나를 개최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1930년대 당시 계몽주의나 계급주의를 내세운 주류 문학과 달리 박태원은 문장과 형식을 실험하고,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경성의 풍경과 풍속을 담으려고 노력했다. 성기웅이 연극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이나 방향이 구보와 다르지 않다. 또 젊은 성기웅과 지금의 성기웅이 달라지지 않았다는 게 중론이다.

<소설가 구보氏와 경성사람들>은 고양아람누리 새라새극장(10.10~13)에 이어 곧바로 CKL스테이지(10.18~27)에서 무대를 올린다. CKL스테이지는 두꺼운 이불을 덮고 늦잠에 빠진 구보를 여동생 경원이 깨우는 연극 첫 장면과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밤늦도록 소설을 쓰는 마지막 장면의 배경인 ‘청계천 광교 옆 다목적(다동) 7번지 공애당 약국 2층 방’이 있던 자리로 박태원의 생가 터이다.

작품에 풍성한 의미를 더하자면, 며칠 기다려서 서울에서 보면 될 것을 새라새극장, 것도 첫날 공연을 본 이유가 있다. 경성 연극이 다시 시리즈를 시작하는 첫 순간을 배우들과 같은 입장에서 즐기고 싶었다. 서울이 아닌 고양이 한 달이 넘게 손발을 맞춘 지역인데다, 데뷔하는 두 배우에게는 더욱 특별한 공간일 테다. 아무려나 시리즈를 비교하자면 완결작 <20세기 건담기> 이상이 없으리라 여겼는바, 작년에 무성영화 변사 못지않은 <20세기 건담기>의 노련한 배우들을 보다가 이번에는 살짝 덜 익은 풋사과랄까, 한편으로 연기가 생생하니 경성사람들과 비슷한 듯싶어 마음에 든다.

그저 한 가지 바람이었다면 새라새극장이 객석을 넣고 빼고 무대변형이 자유무쌍하고, CKL스테이지도 무대와 객석 구분을 입맛에 맞게 구조 변경할 수 있는 극장이라 색다른 무대 구성을 기대하긴 했었다. 하여 앞으로 이 젊은 프로덕션이 올릴 나머지 연작 3편도 연출의 제작 계획과 별개로 기대하며 기다리겠다.

마지막으로 짧게 소회를 더하면 극장 옆 주차장으로 난 쪽문으로 나오는 박경구 배우와 눈이 마주쳤는데 무대의상으로 입은 한복이 평상복인 듯 당황한 기색 없이 느긋한 반면, 전반부 공연이 끝나고 쉬는 시간 로비에서 본 성기웅 연출은 얼굴이 영 거칠거칠하니 “아~, 덜 맞춰봤으니 후반부가 문제다!”며 어디론가 발걸음을 빠르게 놀리고 있었다.

 

글. 이태욱(공연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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