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릭스 멘델스존, 여행을 떠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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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멘델스존 편
독일 라이프치히의 전경. 멘델스존은 1835년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로 취임하고,
1843년 슈만과 함께 라이프치히 음악원을 설립하는 등 라이프치히에 근거를 두고 활약했다. 작곡가로서, 지휘자로서, 피아노와 오르간의 명연주자로서,
음악교육자로서, 그리고 무엇보다 바흐·헨델·베토벤의 작품을 발굴해 널리 알린 음악연구자로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지금 펠릭스 멘델스존은 여행 중이다. 어디 좋은 데 갔냐고 물어본다면, 당신이 좋아할 만한 그런 동네는 아니라고 말해두고 싶다. 그렇다. 멘델스존은 지금 영국에 있다. “스위스나 이탈리아, 프랑스 같은 나라들을 제쳐두고 왜 하필 영국을?” 또는 “대체 거기 뭐 볼 게 있다고 간 거야?”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아마 멘델스존은 짜증을 낼 거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하겠지. “올 만해서 왔다”고.

보고, 경탄하고, 쓰다

사실 멘델스존은 이곳에, 영국에 있을 이유가 많았다. 1829년인 올해, 아버지는 성년을 맞이한 멘델스존에게 어디든 가도 좋다고 이야기해두었다. 그런 기회였으니 평소 가기 힘든 곳을 가보고 싶었다. 그러자 영국에 사는 친구의 얼굴이 떠올랐다. 런던에 위치한 하노버공사관의 서기관으로 일하고 있던 친구 카를 클링게만은 평소 멘델스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런던은 방문할 만한 도시’라고 자주 이야기했다. 무엇보다 멘델스존은 ‘음악이 흘러 넘친다’는 친구의 이야기가 마음에 들었다. 음악이 넘치는 곳이 나쁠 리 없다.

멘델스존은 그래서 영국으로 건너와 친구를 만났다. 그리고 이왕 온 김에 자신의 음악이 통하는지도 확인하고 싶었다. 매사 침착하고 사려 깊은 멘델스존의 아버지는 능력이 잘 발현되는 도시에 재능을 심어야 한다고 누차 강조하곤 했다. 그런 점에서 유럽 문화의 주요 도시였던 런던 또한 고려 대상이었다. 마침 상황이 잘 맞아 떨어져 필하모니 소사이어티의 창단자인 조지 스마트 경이 멘델스존에게 연주회를 제안했다. 그래서 멘델스존은 소년기의 작품, 교향곡 제1번을 시험 삼아 연주했다. 자신의 첫 교향곡이 실제로 어떻게 소리 내는지를 듣고 싶었다. 청중들은 환호와 함께 청년의 과거에 찬사를 보냈다.

 

멘델스존 교향곡 제1번 (프랑크푸르트 방송교향악단 연주)

 

친구도 만났고, 공연도 잘했다. 문제가 있다면, 멘델스존이 안주를 모르는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평소 즐겨 하던 스케치도 한결같은 풍광 앞에서 한없이 단조로워질 뿐이었다. 그래서 내면에 잠재된 욕구를 애써 찾았다. 놀랍게도 그것은 실로 사소하면서도 개인적인 욕구였다. 평소 좋아하던 작품의 저자 만나기. 그것이 멘델스존의 숨은 바람이었다.

펠릭스 뿐만 아니라 멘델스존 가문은 너나 할 것 없이 스코틀랜드 출신 작가 월터 스콧의 작품을, 특히 <웨이벌리>를 좋아했다. 스콧은 유럽 변방의 법관이었지만 그의 소설은 유럽 본토에서 대인기를 끌었다. 프란츠 슈베르트 또한 스콧의 작품인 <호수의 여인>을 읽고 ‘아베 마리아’를 작곡한 바 있었다. 슈베르트는 그저 작품만 읽고 노래를 썼는데, 지금 자신은 영국에 와 있지 않은가? 위대한 작품을 쓴 위대한 작가를 만나러 갈 절호의 기회였다. 그렇게 멘델스존 일행은 스콧이 사는 애버츠퍼드로 갔다.

결과만 말하자면 멘델스존은 원하는 바를 이뤘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멘델스존 일행이 월터 스콧을 만나러 갔을 때, 스콧은 마침 집을 나서고 있었다. 시간을 좀 써주면 좋았으련만 이제 말년의 작가에게 어린 아이들에게 쓸 시간은 없었나 보다. 절망한 멘델스존은 이렇게 남겼다.

“우리는 스콧 경을 멍청히 바라 봤다. 기껏해야 30분 동안 실속 없는 대화를 나누기 위해 하루 종일을 달려왔는데 말이다. 나는 이 위대한 작가와 같이 있다는 사실이 조금도 즐겁지 않았으며, 마침내 우리 자신과 세계와 모든 사물에 흥미를 잃게 되었다. 그날 하루는 최악이었다.”

그래서 멘델스존이 외딴섬으로 향하게 된 건지 모르겠다.

일러스트레이션·봄례

월터 스콧을 그저 보기만 한 멘델스존과 클링게만은 스코틀랜드 서쪽에 살짝 붙어 있는 헤브리데스 제도로 갔다. 그냥 바다가 보고 싶어서 간 것이 아니었다. 멘델스존은 헤브리데스 제도의 여러 섬 중 하나인 스타파 섬에서 발견된 특이한 동굴 이야기를 들었다. 이곳에는 제멋대로 생긴 듯 하면서도 놀랍도록 규칙적인 풍경이 하나 만들어져 있었다. ‘핑갈의 동굴’(Fingal’s Cave)이라 불리는 이곳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보고, 경탄하는 일 밖에 없었다.

친구 클링게만은 “동굴의 돌기둥이 마치 오르간 파이프처럼 보였다”라고 적어두었다. 뱃멀미로 인해 글도, 그림도 손댈 여력이 없었던 멘델스존은 그저 이곳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리고 멀미로 어지러운 머릿속에 겨우 자리를 내 확실한 기억을 남겨 이를 음악으로 만들었다. ‘헤브리데스’ 혹은 ‘핑갈의 동굴’이라 불리는 서곡에서 멘델스존은 이 기이하면서도 위대한 신비를 음악으로 재현한다.

 

멘델스존 「헤브리데스(핑갈의 동굴)」 서곡 (런던 교향악단 연주)

 

불평 많고 몸도 그다지 건강하지 못했지만 보고자 하는 욕구가 넘치는 점에서 멘델스존은 타고난 여행가였다. 멘델스존은 지독한 뱃멀미 이후에도 몸을 쉬지 않고 남쪽으로 옮겼다. 여행지라 할 수도 없는 웨일즈 같은 시골까지 기어이 돌아본 다음, 누나 파니에게 이렇게 편지했다. “이 안개가 많이 끼는 나라는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나의 마음속에 영원한 안식처로 자리 잡을 것이다”라고.

 

멘델스존 교향곡 제3번 ‘스코틀랜드’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 연주)

 

성인이 된 이후 처음 떠났던 해외여행의 한 단락은 이렇게 마무리 된다. 멘델스존은 다시 베를린으로 돌아왔다. 누나의 결혼, 그리고 부모님의 은혼식이 있었기에 돌아온 집이었다. 아, 집이라기보다는 저택이라고 하자. 멘델스존은 오랫동안 이곳에서 추억을 쌓았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위대한 경험이라 할 만한 그런 일들이 멘델스존 가문에서는 평범한 일이었다.

어느 하나 부족함이 없던 어린 시절

많은 작곡가들이 변변찮음과 가난 사이에서 자란 것과는 달리 펠릭스 멘델스존의 집안은 애매함 없이 그냥 대단했다. 펠릭스의 할아버지 모세 멘델스존은 대철학자였다. 교육을 통해 사회에서 소외되고 겉돌고 있던 독일 유대인들을 계몽의 세계로 구원한 것이 바로 펠릭스의 할아버지 모세 멘델스존이었다. 그리고 이 모세 멘델스존에게는 두 명의 아들이 있었다. 요제프와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의 아들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은행가로 일하다가 동업을 시작했다. 가문의 성을 이름으로 삼은 멘델스존 은행이 형제의 동업처였다.

부가 있으면 명예가 없고, 명예가 있으면 부가 모자라는 세상에서 멘델스존의 집안은 이렇게 착실히 부와 명예를 갖춰 놓고 있었다. 더 이루어야 할 것이 있었다면 과연 무엇이었을까?

제임스 워렌 차일드가 1829년 완성한 멘델스존의 초상화

그런데 3대째에 펠릭스 멘델스존이 태어났을 때, 아직 가문이 더 얻을 것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우리는, 부와 명예를 모두 일궈 놓은 가문에서 태어난 것만으로도 그 아이의 삶을 동경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그 아이가 놀라운 재능까지 가지고 태어났다면, 어느 정도까지 교육을 받고 어디까지 성장했을까? 아브라함 멘델스존의 아들, 펠릭스는 그런 삶이 어떤 것인지 몸소 경험하고 있었다.

멘델스존 가문에는 손님이 끊이질 않았다. 그 중에는 철학자 헤겔, 시인 하이네, 과학자 알렉산더 훔볼트 같은 사람들도 있었다. 위대한 요한 볼프강 폰 괴테도 그 중 한 명이었다. 괴테를 볼 때마다 소년 멘델스존은 이 거장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매번 성실하게 피아노를 연주하곤 했다. 어린 멘델스존은 그저 아무렇지도 않게 당시 상황을 남긴다.

“그분은 내 곁에 앉아 있는데, 즉흥연주를 끝내면, 나는 키스를 해달라고 말씀 드리거나 아니면 내가 키스해드려.”

당황했던 것은 멘델스존보다 오히려 괴테 쪽이었던 것 같다. 모차르트의 연주도 들은 바 있던 괴테는 ‘같은 나이 때의 모차르트보다 멘델스존이 더욱 뛰어나다’며 멘델스존의 스승 첼터에게 이렇게 말한다.

“자네 제자가 이미 이룬 성취를 당시의 모차르트와 비교하자면 다 자란 어른의 교양 있는 대화를 어린아이의 혀짤배기소리에 비교하는 것과 같네.”

괴테를 위해 연주하고 있는 멘델스존. 모리츠 오펜하임이 1864년경 완성한 그림이다.

그래, 괴테는 문학가다. 음악 전문가는 아니다. 재능을 평가해준 인물이 그저 유명하다고 해서 맹신할 이유는 없다. 그럼 전문 음악가의 소견을 들어보자. 작곡가이자 위대한 피아니스트였던 이그나츠 모셸레스는 열다섯 살 멘델스존의 음악을 듣고 이렇게 말한다.

“소년 펠릭스는 천재다. 다른 모든 신동들은 그와 비교하면 뭐라고 해야 할까? 그저 재능 있는 아이들, 그 정도에 그친다. 이 펠릭스 멘델스존은 이미 성숙한 예술가다.”

천성이 그래서인지, 겸손할 필요도 없어서인지는 몰라도 멘델스존은 생각을 그대로 입 밖으로 내뱉기도 했다. 언젠가 또래이자 피아노 신동으로 이름 높던 프란츠 리스트의 연주를 들은 멘델스존은 이렇게 말했다.

“손가락은 많은데, 두뇌는 거의 없어.”

행복한 여행, 위대한 음악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렇게 말할 수도 있는 삶이었다. 결핍 없는 삶에게 이해를 바라는 일만큼 허망한 것도 없다. 아무튼 펠릭스 멘델스존은 이런 인생을 보냈고, 앞으로도 비슷한 인생을 보낼 터였다.

물론 여행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제 막 성년이 된 멘델스존은 다시 떠날 것이다. 집에서 비교적 가까운 이탈리아, 스위스, 프랑스를 다음 행선지로 잡았다. 멘델스존은 여행 계획을 세우며 이렇게 생각한다.

‘이탈리아로 가기 전에는 바이마르에 들려 괴테 선생을 다시 만나도 좋겠지. 그리고 따뜻한 남쪽으로 가야겠다. 거기서 원 없이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듣고 싶은 것을 듣고, 써야지. 그리고 그런 경험을 될 수 있는 대로 음악으로 남기고 싶다. 연초에 베를린 대학이 요청한 음악학과 교수 자리는 이미 친구에게 기회를 넘긴지 오래다. 돈이나 커리어 걱정은 잠시 접어두자. 아니 영영 접어둬도 좋겠지. 오로지 나 자신을 위해, 나의 예술을 위해 살자.’

펠릭스 멘델스존의 스무 살이 이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멘델스존 교향곡 제4번 ‘이탈리아’ (프랑크푸르트 방송교향악단 연주)
왼쪽부터 멘델스존이 그린 피렌체, 베네치아, 루체른의 전경.
그림에도 소질이 있었던 멘델스존은 이처럼 여행지를 그림으로 남기기도 했다.

글. 윤무진(음악칼럼니스트)

필자 윤무진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사에서 음악학을, 전문사에서 음악사를 공부했다. 유니버설, 워너, 소니뮤직 등과 함께 클래식 음악을 설명하고, 소개하는 일을 해오고 있으며, 음악을 문장으로 옮기는 작업을 고민하며 지내고 있다.
‘가족사로 읽는 음악사’는 세계 유명 작곡가들의 생애를 그들의 ‘가족’을 통해 들여다보며,
클래식에 관한 교양지식은 물론 작곡가의 삶을 통해 우리의 삶을 돌아보는 새로운 시선을 담아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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