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올라와 피아노, 환상을 쏘다

섬세하고 긴밀한 실내악 연주의 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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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체코에 대한 애정과 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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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019년 5월 27일
2019 디토 페스티벌 in 고양
리처드 용재 오닐 & 제레미 덴크 ‘환상곡’

올해로 국내 데뷔 15주년을 맞는 비올리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이 조슈아 벨의 명콤비로 알려진 지적인 피아니스트, 제레미 덴크와 함께 ‘2019 디토 페스티벌 in 고양’의 첫 번째 문을 연다. 6월 12일(수) 고양아람누리 아람음악당에서 ‘환상곡’을 주제로 펼쳐지는 두 사람의 비범한 조우는 바흐와 슈만에 이어 힌데미트와 클라크 등의 현대음악까지 다양한 레퍼토리로 채워질 예정이다. 나직한 비올라 사운드와 맑은 피아노 사운드가 어우러져 그려낼 신비롭고 낭만적인 세계를 류태형 음악평론가의 프로그램 노트를 통해 미리 만나본다. [편집자주]

비올리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과 피아니스트 제레미 덴크

상반된 두 양식의 이상적인 조화

바흐 : 반음계적 환상곡과 푸가 d단조, BWV 903

이 곡은 쇼팽의 반음계적 화성을 100년 앞서 나타냈다는 평가를 받는 바흐의 예언적 작품이다. 작곡 배경과 시기가 명확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1720년경 작곡이 시작된 이후 1730년경 최종적으로 완성됐다고 추정된다.

고전적이고 낭만적인 성격의 대조적인 두 음악 양식을 하나의 곡 안에 잘 통합했다는 면에서 가치가 높다. 환상과 정열, 개방과 대담, 변화가 풍부한 자유분방함을 특징으로 하는 환상곡은 원심적인 낭만주의 음악의 전형이다. 한편 지성, 치밀함, 일관성, 형식미 등이 뒷받침되어 있는 푸가는 그 구심적 정신과 구조주의에 의한 고전주의 음악의 전범이다. 이렇듯 자신의 상반된 면모를 극대화할 수 있기 때문에 많은 피아니스트들이 즐겨 연주한다.

‘온음계적’(diatonic)에 대칭돼 쓰이는 ‘반음계적’(chromatic)이란 말은 그리스어 크로마(chroma), 즉 색의 뜻에서 유래한다. 최저음과 최고음 사이가 완전4도를 이루는 4음 음계인 테트라 코드(Tetra chord) 내부에서 반음이 연속되는 것을 가리킨다.

‘환상곡과 푸가’라는 말은 ‘토카타와 푸가’, ‘전주곡과 푸가’ 등과 같이 서로 다른 성격의 두 곡으로 구성하는 방식이다. 바로크 시기 끝 무렵에 이런 방식이 성행했다.

환상곡은 템포가 수시로 바뀌고 화려하고 기교적이다. 음계 형식의 악구를 두 번 연주한 다음 푸가 주제와 관련된 선율이 등장하고 클라이맥스를 형성한 후에 레치타티보 형태로 진행한다. 3성부로 이뤄진 푸가는 긴 주제 선율과 주제 사이에 에피소드를 삽입해 세 부분으로 이뤄졌다. 바흐가 영향을 받은 이탈리아 건반음악의 요소들을 살펴볼 수 있다.

 

바흐 반음계적 환상곡과 푸가 d단조 (안드라스 쉬프 연주)

따로 또 같이, 낭만이 가득한 세 곡의 소품

슈만 : 비올라 환상 소곡집, 작품번호 73

1849년 봄, 수확이 가장 많았던 이 ‘결실의 해’에 슈만은 드레스덴에서 피아노곡과 그때까지 잘 연주되지 않았던 악기들을 위한 실내악 작품들을 작곡하기 시작했다. 「클라리넷을 위한 환상 소곡집 Op.73」과 「호른을 위한 아다지오와 알레그로 Op.70」, 「첼로를 위한 5개의 민요풍 소품집 Op.102」, 「오보에를 위한 세 개의 로망스 Op.94」와 1851년 3월에 작곡한 「비올라와 피아노를 위한 이야기 그림책 Op.113」 등을 들 수 있다.

Op.70을 제외하고는 성격적 소품의 연작이다. 대개 세 도막 가요 형식이며 분명하게 기교적이고, 각 악기의 특정한 성격을 강조하는 작품들이다. 그런데 악보 판매를 늘릴 목적으로 다른 악기들을 위한 버전의 악보가 출판되었다. Op.70과 Op.73은 바이올린이나 첼로용, Op.94는 클라리넷이나 바이올린용, Op.102와 Op.113은 바이올린용 악보로도 발간됐다.

슈만이 1849년 2월 클라리넷 작품으로 일련의 작곡을 시작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베버와 슈포어 이래로 클라리넷은 낭만주의 작곡가들이 애용하던 악기였다. 슈만의 ‘가계부’같은 악보에 보면 (세 곡이 여전히 ‘수아레 슈튀케’로 나와 있는) 「클라리넷을 위한 환상 소곡집 Op.73」은 1849년 2월 11일과 13일 사이에 드레스덴에서 작곡되었다. 2월 18일 클라라 슈만과 드레스덴 궁정악단의 클라리네티스트 요한 고틀립 코테는 기쁘게 이 작품을 연주했다.

슈만은 초판의 세 곡을 세심하게 손 봐서 개정판을 작곡했는데, 카셀의 카를 루크하르트가 1849년 7월 출판했다. 1850년 2월 ‘음악신보’에는 이 작품에 관한 감탄과 열광이 섞인 리뷰가 게재되었다.

“황홀한 흥분에 막 우울한 숨결이 닿아 승리의 기쁨으로 향한다-환상적인 소품들의 성격이 이러하다. 세 곡은 각기 완전하지만, 슈만은 이들을 중단 없는 아타카로 이어 작품들 사이를 더욱 가깝게 묶는다. 개별 작품의 여러 구조적인 양상들과 마찬가지로 두드러진 셋잇단음표, 변치 않는 조성과 음보 등은 세 곡을 지속적이고 의도적이라는 공통점으로 통합시킨다.”

 

첼로 버전의 슈만 환상 소곡집 (안드레이 이오니처, 조성진 연주)

신고전주의 작풍이 느껴지는 걸출한 작품

힌데미트 : 비올라 소나타 제4번 F장조, 작품번호 11

파울 힌데미트는 프랑크푸르트 오페라의 악장으로 연주하는 등 바이올리니스트로 알려졌지만 뛰어난 비올리스트이기도 했다. 생애에 걸쳐 비올라 곡들을 작곡하며, 독주악기로서 비올라의 영역을 넓혔다. 한 곡, 한 곡이 비올라의 악기 특성을 잘 나타낸다.

1922년에 출판된 힌데미트의 Op.11은 현악기를 위한 여섯 곡의 소나타로 이루어졌다.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가 두 곡, 첼로와 피아노, 비올라와 피아노, 무반주 비올라, 무반주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 각각 한 곡씩이다. 그 중 제4번인 비올라 소나타는 1919년 작으로 이들 가운데 가장 걸출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20세기의 신고전주의적인 작풍을 보여주며 멜로디의 흐름이 또렷하다.

1악장은 판타지(Fantasie)로 자유롭게 진행된다. 주제는 한두 마디에서 비올라가 제시한다. 비올라와 피아노는 모두 6/8박자의 리듬감이 뚜렷하다. F조의 비올라 주제 선율과 달리 두 악기는 불협화음을 연주하고 조성감이 흐려진다. 두 마디 동안 전조 경과구를 거친 주제는 네 마디부터 피아노에서 다시 등장한다. 주제는 피아노와 비올라 선율이 서로 모방되어 반복되기도 하며 조화를 이룬다.

2악장은 주제와 변주이다. 작은 네 개의 변주곡이 민요처럼 연주된다. 조화롭던 음악이 다성적 불협화음을 사용하면서 모험적으로 변한다. 두 악기가 서로 경쟁하는 느낌이다. 3악장 주제는 2악장의 마지막 변주가 바탕이다. 피아노의 화음과 양손 옥타브가 강력하다. 비올라의 어두운 음색을 압도한다. 코다의 분위기는 밝고 활기차다.

 

힌데미트 「비올라 소나타 제4번 F장조(티모시 리다웃 연주)

환상의 세계가 음악으로 아른거리다

슈만 : 비올라와 피아노를 위한 이야기 그림책, 작품번호 113

슈만이 1851년 3월에 쓴 이 곡은 비올라와 피아노를 위한 작품이다. 슈만은 이 곡을 독일의 비올리스트이자 지휘자 빌헬름 요제프 폰 바질레프스키에게 헌정했다. 20여 년 전의 초기 피아노 소품들인 「아베크 변주곡 Op.1」이나 「나비 Op.2」와 흡사한 분위기로 환상의 세계가 아른거린다. 1악장과 2악장은 동화 <라푼젤>을, 3악장은 동화 <룸펠슈틸츠헨>을, 4악장은 동화 <잠자는 미녀>를 각각 묘사하고 있다.

1악장 ‘빠르지 않게’(Not Fast)는 부드럽지만 어두운 선율을 표현한다. 2악장 ‘생동감 있게’(Lively)는 비올라와 피아노가 서로에게 각인시키듯 경쟁하는 속에서 발랄한 주제는 두 개의 부주제와 대비된다. 3악장 ‘재빨리’(Quick)에서는 날렵하게 움직이는 비올라와 딴청 피우는 듯한 피아노가 대조된다. 4악장 ‘느리게, 우울한 표현으로’(Slowly, with Melancholic Expression)는 낭랑한 장조이나 멜랑콜릭한 연주를 요구하여 아이러니컬하다. 브람스 피아노 소나타의 아다지오 악장과 흡사하다.

 

슈만 비올라와 피아노를 위한 이야기 그림책 (마틴 슈테그너 연주)

비올라가 표현할 수 있는 최상의 것

클라크 : 비올라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레베카 헬퍼리히 클라크(Rebecca Helferich Clarke, 1886~1979)는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 사이의 중요한 작곡가로, 힌데미트처럼 그녀 역시 작곡가이기 이전에 자신이 비올리스트였던 인물이다. 당대에 가장 두각을 드러낸 영국의 여성 작곡가로 평가받고 있으며, 주로 비올라 실내악곡 작품으로 유명하다.

1919년, 클라크는 버크셔 실내악 축제 콩쿠르에 익명으로 「비올라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를 제출했다. 이 작품은 에른스트 블로흐의 「비올라와 피아노를 위한 모음곡」과 정확히 동점을 이뤘다. 심사위원들은 끝내 블로흐를 선택했지만 훗날 ‘1919’라는 타이틀로 여러 앨범이 발매될 만큼 두 작품은 흥미로운 탄생 배경을 지니고 있다. 클라크와 블로흐, 힌데미트가 나란히 발표한 비올라 작품들은 오늘날 비올라 레퍼토리의 고전으로 손꼽힌다. 아이작 쇼튼의 「비올라 1919」(Crystal Records), 토마스 리블의 「소나타 1919」(Pan Classics) 등 세 곡을 함께 모은 음반들도 있다.

클라크와 블로흐, 힌데미트가 1919년 발표한 비올라 작품들을 함께 모은 음반들

클라크의 「비올라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는 1악장 도입부에서 곡 전체의 모습을 미리 예고하듯 비올라 솔로가 이어진다. 곧 피아노가 등장해 격정적인 만남을 노래한다. 라벨의 오묘한 색채과 브람스의 유화풍 텁텁함이 함께 느껴지는 곡이다. 1악장과 2악장에서 거친 질감과 유려함을 동시에 표현하는 비올라의 악기적 매력이 성큼 앞으로 나선다.

프랑크 바이올린 소나타에서 느낄 수 있는 서정과 격정의 양면성이 이 곡에도 있다. 미국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뉴욕에서 생을 마감했지만, 고향인 영국의 민요를 사랑했던 여성 작곡가의 서정적인 면모를 느낄 수 있는 곳은 3악장이다. “비올라가 표현할 수 있는 최상의 측면을 가장 잘 드러낸다”는 리처드 용재 오닐의 말처럼 새로운 발견으로 다가설 작품이다.

글. 류태형(음악평론가)
사진제공. 크레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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