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보헤미안의 미국 생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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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사로 읽는 음악사 ⑧
안토닌 드보르작
미국 뉴욕의 그랜드 센트럴 스테이션. 어린 시절부터 기차 사랑이 유난했던 드보르작은, 미국에서 고향 생각이 날 때면 그랜드 센트럴 스테이션에서 기차를 보며 향수를 달랬다고 한다. 보헤미안 작곡가 안토닌 드보르작(그가 태어날 당시 보헤미아는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고 있었으며, 1918년 체코슬로바키아라는 나라가 생겨났다가 1993년 현재의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분리된다)은 1892년 51세 나이에 미국 국립 음악원의 원장으로 초빙되었다. 당대에 영향력이 컸던 음악출판사업자 짐로크와의 관계가 끊기던 시기와 맞물렸다. ‘신세계’ 미국으로 간 드보르작은 흑인 영가나 아메리카 원주민 민요 등 민속음악을 전수받는 데 힘썼다.

가난의 충실한 친구

1889년의 초입. 안토닌 드보르작은 연초부터 잔뜩 짜증이 나 있었다. 출판 담당자였던 프리츠 짐로크가 이번에도 자신을 무시한다는 느낌을 도저히 지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40대 후반의 나이.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고 경력도 쌓을 만큼 쌓았다. 그런데 이 사람은 뭐가 더 필요하다는 걸까? 드보르작의 경력은 이미 충분함을 넘어 차고 흐르는 상황이었지만, 짐로크라는 인간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직접적인 발단은 교향곡 8번이었다. 드보르작은 1889년 8월부터 11월 사이 이 교향곡을 썼다. 프라하 음악원의 교수직 제의도 거절해가면서 쓴 곡이었다. 과연, 교향곡을 여덟 곡이나 쓴 사람의 솜씨는 유려했다. 무엇보다 교향곡 8번은 ‘대중적’이라는 표현을 쓸 수 있을 정도로 귀에 잘 들어왔다. 특히 3악장과 4악장은 춤곡에서 들을 법한 선율로 꽉 차 있었다. 아무리 긴 곡이 무시당하는 상황이라지만, 교향곡 8번 같은 작품이 출판되지 못하는 경우를 드보르작은 상상할 수 없었다.

 

드보르작 교향곡 8번 (프랑크푸르트 방송교향악단, 만프레트 호넥 지휘)

 

그러나 짐로크는 출판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짐로크가 그의 또 다른 고객 브람스를 대하는 태도와는 영 딴판이었다. 브람스를 욕할 일은 아니었다. 요하네스 브람스는 드보르작의 평생 은인이었으니까. 자신을 오스트리아 유학 장학생으로 뽑아준 이가 브람스였고, 팔리지 않던 작품을 직접 나서서 소개해준 것도 브람스였다. ‘그래 브람스를 탓할 일은 아니다.’

그런데 갑자기 발작처럼 「슬라브 무곡」의 기억이 떠오른다. 이 발작은 꽤 역사가 깊다. 한 10년쯤 되었을까?

 

드보르작 「슬라브 무곡 1권」 (상트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졸탄 코치슈 지휘)

 

1878년, 드보르작은 짐로크의 요청으로 이 「슬라브 무곡」을 썼다. 지독하게 힘들던 시절이었다. 가난은 끝이 보이지 않았고 설상가상으로 그때까지 낳았던 아이 셋은 모두 3년도 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었다. 그런 시점에 드보르작은 이 「슬라브 무곡」으로 일대 반전을 이룰 수 있었다. 드보르작은 짐로크에게 계약금을 받았다. 오랫동안 가난의 충실한 친구였던 그에게는 상당한 금액이었다. 친구들에게 자랑도 꽤나 했었다. “내 인생, 이제는 달라지나봐.” 그런데 말이다. 「슬라브 무곡」은 유럽 전역을 휩쓰는 대히트를 했다. 자신이 받아 든 계약금을 초라하게 느끼지 않기 위해서 드보르작은 열심히 일했다.

그런 억울함이 한 10년쯤 쌓인 것이다. 이제 짐로크를 미워하는 일이라면 그 누구보다 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작품에는 하등 도움 안 되는 일이니 다른 생각을 하도록 하자. 아, 이것만은 확실하게 해두고 말이다. 이제 프리츠 짐로크라는 인물과는 다시는 거래하지 않으리라는 것! 마침 프라하 음악원에서의 제의가 다시 들어왔다. 드보르작은 흔쾌히 승낙한다. 명예를 충당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렇게 드보르작은 훌륭한 선생의 모범이 되어 학생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로 이야기가 이어지면 좋았겠지만, 가르치는 일이 그렇게나 싫었을 줄이야. 드보르작이 재능 없는 교육자라는 사실을 증언하는 기록은 아주 많다. 어느 기록에 따르면 드보르작은 그날의 감정에 따르는 선생이었다. 드보르작은 말한다.

“이걸 못한다면 작곡가도 아니란 말이지.”

어떤 날에는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학생을 다독인다. 어제와 다른 스승은 이렇게 말한다.

“이 부분은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느낌인데, 조금 더 생각해보게나.”

1882년경의 안토닌 드보르작 (출처 : WIKIMEDIA COMMONS)

‘약속의 땅’ 미국으로

지넷 서버 부인의 전보가 온 것이 그즈음이었다. 미국 국립 음악원의 회장으로 있던 부인은 드보르작에게 미국 국립 음악원의 원장, 그리고 그곳의 작곡과 교수로 와달라는 요청을 보내왔다. 조건은 훌륭했다. 연간 8개월 근무에 4개월 휴가, 그리고 여러 연주회가 예정되어 있는 등 파격적인 제안들이 많았다.

그 중에서 가장 훌륭한 것은 급료였다. 드보르작은 연간 15,000달러라는 금액을 제안 받았는데 이는 당시 드보르작이 근무하던 프라하 음악원 급여의 25배에 해당하는 액수였다. 과거 프라하 음악원의 교수 자리를 한번 거절했던 자신을 떠올린다. 그런데 이번에는 도저히 거절할만한 이유가 떠오르지 않는다. ‘그럼 가야 하나?’ 생각해보면 또 그렇지만도 않다. ‘여기에는 사랑하는 사람이 많단 말이지.’ 드보르작은 자신을 다독이는 데에 꽤 시간을 들였다.

“그러니까 8개월만 가르치면, 1년에 8개월만 좀 참으면 된다는 말이지? 그 8개월을 쪼개 쓰면 작업할 시간이 나올 테고…”

드보르작은 미국에 가야 하는 이유를 찾고 싶었다. 같은 언어를 쓰는 영국에서의 경험을 생각해본다. 1884년의 방문을 시작으로 드보르작은 그때까지 영국을 여덟 번이나 방문했었다. 공연은 언제나 대성공이었고, 그곳의 과도한 호의 덕에 돈도 꽤 만질 수 있었다. 그런 경험으로 미뤄 보면 미국이라는 나라도 자신에게 호의적일 가능성이 높다. 1879년부터 미국에서도 자신의 곡을 연주한다는 사실도 전해 들었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 경제적인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드보르작의 나이는 이제 오십에 다다르고 있었다. 그 사이 자식은 여섯 명이 되었다. 가장 큰 아이가 열세 살, 그리고 막내가 세 살이었다. 장성한 아이가 하나도 없었다. 결국 드보르작은 미국행을 결정한다. 이 때가 1891년의 12월이었다.

미국행 배를 타기 전까지는 시간이 꽤 있었다. 거의 10개월이나 되는 시간이었다. 그동안 드보르작은 마치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사람처럼 요란스러웠다. 수차례의 고별 연주회를 가졌다. 거의 체코 전역을 들쑤시고 다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연주회와 함께 친구들에게는 쉴 새 없이 작별 인사를 했다. 고향을 지독히도 사랑했으니, 이 이별의 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고 드보르작은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도 시간은 온다. 1892년 9월 15일, 드보르작과 아내, 그리고 큰딸 오틸리에와 큰아들 안토닌만을 데리고 미국으로 향했다. 나머지 가족들은 고향에 남았다. 뉴욕에 도착한 것은 같은 달 26일이었다. 대서양을 건너는 데에만 9일이 소요되었다.

미국은 드보르작의 가족이 도착하자마자 환영회를 열어주었다. 얼마 뒤에는 카네기 홀에서 드보르작 작품 연주회가 열렸다. 이유 없는 환대 같은 것은 없다. 그들은 분명 무언가를 바라고 있었다. 서버 부인은 드보르작의 민족주의적 성향이 미국 음악계에 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해 그를 초빙했었다. 드보르작은 이렇게 고향에 편지했다.

“여기 미국인들은 제게 기대하는 바가 큽니다. 미국을 이른바 ‘약속의 땅’으로 만들기 위해, 다시 말해 미국이라는 나라에 어울리는 음악으로 보답해야 할 겁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이 되겠지만 신의 도움으로 내가 그 일을 성취할 수 있길 바랄 뿐이지요.”

드보르작 교향곡 9번 ‘신세계로부터’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앨런 길버트 지휘)

드보르작의 신세계

교향곡 9번 ‘신세계로부터’는 드보르작이 미국에서 시작해 미국에서 완성한 첫 작품이었다. 그가 미국에 남긴 가장 큰 유산이 바로 교향곡 9번 ‘신세계로부터’였다. 이 교향곡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말들이 많다. 이 작품의 멜로디가 드보르작이 미국에서 접했던 흑인 영가에서 왔다는 말이 있는가 하면, 이 작품의 주요 테마는 드보르작의 고향인 보헤미아에서 온 것이라는 의견이 팽팽한 것이다. 어쨌든 교향곡 ‘신세계로부터’가 미국이라는 땅에 드보르작이 남기는 선물이라는 데에는 별다른 이견이 없으리라.

‘신세계로부터’ 교향곡의 작곡을 마친 뒤 드보르작은 여름휴가를 떠났다. 아이오와 주의 스필빌. 이곳에서 나고 자란 드보르작의 체코계 조교 요제프 코바르지크의 추천으로 결정된 휴가지였다. 때마침 고향에 남아 있던 자식들까지 모두 뉴욕에 도착했다. 오랜만에 모두가 모인 드보르작의 가족들은 스필빌로 향했다. 대부분 체코 이민자들로 구성되어 있던 스필빌에서 드보르작의 가족은 잠시 고향 생각을 멈출 수 있었다.

뉴욕으로 돌아와서는 가족들에게 나이아가라 폭포도 보여줄 수 있었다. 유럽에서는 도저히 보지 못할 사람들과 풍경을 많이 볼 수 있었던 것이 미국 생활의 장점이라면 장점이었다. 문제가 있다면 언제나 본업이었다. 천성이 시골사람이었던 드보르작에게는 미국, 그것도 뉴욕 사람들의 친화력이 적잖이 피곤한 것이었다. 각종 연회 초대장은 끊이질 않는데다가 또 연주회 초대는 왜 이렇게도 많은지. 그 때문인지 새로운 작품인 첼로 협주곡 작업도 지지부진했다. 드보르작은 편지로나마 고향을 찾았다.

“고향에서 작업했더라면 이전에 끝냈을 만한 일인데, 여기에서는 못하겠어. 월요일에는 학생을 가르쳐야 하고, 화요일은 자유시간이고, 다른 날은 대체로 바쁘고 그래. 아무튼 여기서는 작품에 쓸 시간이 없다고. 오,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마음이 들 때면 드보르작은 기차를 보러 갔다. 고향 주변에 철도가 나던 여덟 살 무렵부터 시작된 기차 사랑은 나이가 먹어서도 변함이 없었다. 프라하 음악원의 교수로 일하던 시절, 드보르작이 자리에 없으면 그의 조교는 프라하 역으로 갔다. 그럼 기차를 구경하는 드보르작이 플랫폼에 어김없이 앉아 있는 것이다. 뉴욕이라고 다를까. 만약 드보르작이 ‘뉴욕에 와서 좋았다’라고 말한다면 그건 그랜드 센트럴 스테이션의 공이 클 것이다.

오늘도 드보르작은 조교 코바르지크를 데리고 기차를 보러 갔다. 오늘은 역 대신 다른 곳으로 갔다. 기차 보기 좋은 드보르작만의 명당이 있는 것이다. 해가 뉘엿뉘엿 지던 오후, 저 멀리로 출발하는 기차가 보인다.

“이봐 요제프, 저기 출발했다고. 오오! 간다.”

드보르작의 신세계가 저기 지나가고 있다.

일러스트레이션·봄례

글. 윤무진(음악칼럼니스트)

필자 윤무진은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사에서 음악학을, 전문사에서 음악사를 공부했다. 유니버설, 워너, 소니뮤직 등과 함께 클래식 음악을 설명하고, 소개하는 일을 해오고 있으며, 음악을 문장으로 옮기는 작업을 고민하며 지내고 있다.
‘가족사로 읽는 음악사’는 세계 유명 작곡가들의 생애를 그들의 ‘가족’을 통해 들여다보며,
클래식에 관한 교양지식은 물론 작곡가의 삶을 통해 우리의 삶을 돌아보는 새로운 시선을 담아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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