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많은 가로등이 켜지길 기다리며

낭만의 빛이 한가득, 웃음이 한가득
2019년 12월 22일
삶을 풍요롭게 하는 지혜의 향연
2019년 12월 22일
연극 <가로등이 켜지는 순간> 리뷰

지난 11월 29일(금)부터 12월 1일(일)까지 고양아람누리 새라새극장에서 공연된 연극 <가로등이 켜지는 순간>(연지아 작·연출)은 아파트 경비원 해고의 문제, 심리상담자와 내담자의 갈등에 관한 문제를 예리하게 다루면서도 사람의 따스한 온기를 담아내고자 하는 노력이 돋보인 작품이었다. 공연칼럼니스트 김일송의 공연평을 통해 연극 <가로등이 켜지는 순간>을 다시 생각해본다. [편집자주]

같은 아파트에서 경비원으로 근무 중인 김 씨와 이 씨는 오랜 지기 사이다. 상반된 성격으로 인해 티격태격하면서도 서로의 마음을 잘 헤아려온 두 사람. 그러던 어느 날 경비원 해고에 관한 주민투표가 벌어지는데…. 과연 두 사람의 사이는 어떻게 될까.

비정한 현실 앞의 두 사람

겨울이라 해가 짧다. 여섯 시면 온 사방이 캄캄해진다. 사위가 어둑해질 때 불을 밝히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나, 연극 <가로등이 켜지는 순간>에서 당연한 일이 아니다. 적어도 이 연극의 주인공에게는 그렇다. 주인공은 서로 마주 보는 초소에서 근무 중인 아파트 경비원 이 씨와 김 씨다. 이 씨는 주민들 눈치를 살피느라 가로등 하나 마음대로 켜지 못하는 소심한 인물이다. 이에 반해, 김 씨는 주민들 등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음 내키는 대로 거침없이 행동하는 인물이다.

<가로등이 켜지는 순간>의 기둥이 되는 사건은 경비원 해고이다. 연극은 경비원 해고에 대한 주민투표가 벌어지는 아파트를 배경으로 한다. 해고가 모든 경비원들을 대상으로 진행되었다면, 차라리 나았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두 사람이 연대했을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연극은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치는 노동쟁의 연극이 아니다. 이 연극에서는 더 많은 주민들로부터 지지를 받은 한 사람만 살아남게 되어 있다. 이 적자생존의 비정한 현실 앞에서 두 사람은 연대할 수 있을까?

이 씨와 김 씨, 두 사람에겐 경비업을 포기할 수 없는 나름의 사정이 있다. 이 씨에겐 노모와 늦도록 취직을 하지 못한 아들이 있고, 김 씨에겐 병중인 아내와 자식이 있다. 더구나 둘은 학창시절을 함께 보낸 오랜 지기 사이다. 그 때문에 대립하듯 경쟁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눈앞의 투표함이 신경 쓰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노골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상대가 한 표라도 더 얻는 게 아닐까, 한 표라도 더 얻으려 무언가를 하지 않을까 늘 촉각을 곧추세우고 있다.

그리고 이를 악용하는 주민이 있다. 물론 주민투표가 실시되기 전부터 주민들의 갑질은 존재했을 것이다. 이는 가로등 점멸 건으로도 예측이 가능하다. 연극에서는 어떤 경비원이 입주민 부부싸움에 휘말렸다가 주민들 사생활에 끼어들었다는 이유로 해고되었다는 이야기가 등장하기도 한다. 이처럼 주민들의 위세가 등등한데, 경비원의 생사여탈권까지 쥐었으니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과연 막무가내 김 씨는 과연 무사할 수 있을까?

이 아파트에는 사는 심리상담사 최 양은 가정폭력과 학교폭력에 시달리던 박 군을 상담하고 있다. 상담이 진행될수록 박 군은 최 양에게 집착을 보이고, 급기야 최 양의 집까지 찾아가게 된다. 최 양은 경비원 이 씨에게 도움을 청하는데….

주체적인 삶을 살게 될까

한편, 이 연극에는 이들 경비원 외에 또 다른 두 인물이 등장한다. 아파트의 입주민인 심리상담사 최 양과 최 양의 내담자인 고등학생 박 군이다. 가정폭력과 학교폭력에 시달리던 중 최 양에게 상담을 받게 된 박 군은, 상담 이후로 최 양에게 집착을 보이며 최 양의 집까지 쫓아오게 된다. 연극의 마지막 장에서 박 군은 최 양의 집에 침입해 자해를 시도했다가 병원에 이송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때 최 양을 구하고 박 군을 병원으로 보낸 이는, 그동안 최 양과 박 군 사이에 끼어 난처한 처지가 됐던 경비원 이 씨다. 그래서 이 씨는 해고되지 않고 경비업무를 계속 맡게 될까. 미리 결론을 당겨 말하자면, 결국은 김 씨가 남게 된다. 이 씨는 왜 아파트를 떠나게 되었을까?

공연에서는 가로등이 세 번 켜진다. 처음에는 김 씨가 켠다. 이 씨에게 점등 하나 마음대로 하지 못하느냐 나무라며 켜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이 씨가 불을 밝힌다. 스위치를 누르며 이 씨는 말한다. “이제야 내가 켠 것 같아.” 사소한 일에 불과하나, 이제 그는 비로소 자신의 의지대로 선택을 하게 된 것이다. 이 씨는 해고를 당하기 전에, 제 발로 사표를 내고 아파트를 떠난다. 이제 그는 주체적인 삶을 살게 될까?

비로소 자신의 의지로 선택하게 된 이 씨. 이제 그는 주체적인 삶을 살게 될까?

더 많은 가로등이 켜진다면

소외된 이들에 향한 연지아 작가의 시선은 따듯하고 순수하다. 작은 부조리조차 연민의 눈길로 바라본다. 다만 공연의 일부 설정에는 동의하기가 쉽지 않다. 먼저 투표의 안건이다. 주민투표가 감축 여부 혹은 감축 비율이 아닌, 직접 해고할 대상자를 가르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투표는 현실에서 보기 드문 경우가 아닐까. 나아가 공연에서는 김 씨와 이 씨 각자의 공간 앞에 투표함을 하나씩 두는 공개투표 방식으로 투표가 진행된다. 이렇게 민감한 사안에 대해, 이처럼 공개적 방식의 투표가 가능할까. 이러한 설정은 작품을 이끌어가는 장치로는 유용하다. 그러나 그것이 공감을 이끌어내는 장치로도 유용할지는 점검해보아야 할 듯 보인다.

무엇보다 마지막 이 씨의 선택은 존중받아 마땅한 일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움이 남는다. 앞서 언급했던 대로 이 연극은 근로기준법의 준수를 외치는, 사측의 부당해고에 맞선 노동자들의 연대를 요구하는 연극은 아니다. 그것은 작가의 의도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작가는 이 씨가 주체적 삶을 택한 그 행보를 강조하는 듯하고, 이는 충분히 존중받을 만한 행동이다. 그러나 한편, 그의 선택이 개인의 삶은 바꿀지 모르나, 다른 것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다는 사실이 아쉽다. 이 씨의 희생은 부조리한 현실의 질서를 공고하게 만드는 데 이용될 수도 있을 것이다.

좋은 작품과 그렇지 않은 작품을 가르는 기준에 대해서라면 저마다 다른 기준이 있을 것이고, 그중에는 정서적 위로도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것이다. 현실에는 이 씨와 같은 희생을 선택하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고, 그들에게 <가로등이 켜지는 순간>은 작은 위로가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여기에 다른 가치가 더해졌다면 어땠을까? 그가 밝힌 가로등이, 다른 가로등들을 켤 수 있는 도화선이 되었다면 어땠을까? 정서적 위로에 더해 인식의 확장은 작품을 더 풍성하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글. 김일송(공연칼럼니스트)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