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세 생일날 문득, 창문을 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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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연극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이 4월 25일과 26일 고양아람누리 새라새극장에서 공연된다. 자신의 100세 생일날 아침, 잠옷 바람으로 양로원 창문을 넘어 도망치기 시작한 노인 ‘알란’. 100년간 의도치 않게 근현대사의 격변에 휘말리며 황당한 모험을 겪게 되는 그의 파란만장한 일대기가 유쾌하고 빠른 템포로 펼쳐진다.

현실과 가상, 소설과 역사를 아우르는 기발함

연극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은 스웨덴 작가 요나스 요나손이 2009년에 쓴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스웨덴에서만 120만 부가 팔린 소설은, 이후 35개국 언어로 번역되는 등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었으며 2013년 동명의 스웨덴 영화가 제작되기에 이른다. 우리나라에서도 2013년 출판(임호경 역, 열린책들) 직후 꽤 오랫동안 여러 서점에서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한 바 있다.

언뜻 보면 황당하고, 어처구니없는 사건들로 점철되어 있는 이 이야기가 이토록 광범위한 독자들로부터, 이처럼 오랫동안 사랑받을 수 있는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허구인 주인공의 삶과 실제 역사적 사건을 교묘하게 엮어 현실과 가상, 소설과 역사를 아우르는 기발한 상상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1905년, 스웨덴의 한 시골마을에서 태어난 ‘알란’은 스웨덴과 스페인, 미국, 러시아, 중국과 인도네시아 등 세계 곳곳을 방랑하면서 역사적 인물들을 만나게 되고, 그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역사의 흐름을 바꿔놓는다. 다소 억지스러우면서도 당대의 역사적, 사회적 흐름 안에서 나름대로 가능할 법한 상상력을 펼쳐 놓는 덕분에 관객들은 허구인 줄 뻔히 알면서도 흔쾌히 속아주게 된다.

무대이기에 가능한 시도, 다채로운 변신의 연속

지이선 작가와 김태형 연출 등 국내 창작진을 통해 무대언어로 재탄생한 연극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은 2018년 대학로에서 처음 공연되어 호평 받았다. 100년이 넘는 세월을 가로지르는 방대한 원작을 압축해낸 연극에서는 사람과 동물, 시대와 장소, 캐릭터와 배우 자신을 끊임없이 넘나들며 다채로운 변신의 장을 펼쳐내는 배우들의 열연이 특히 돋보인다.

주인공 ‘알란’을 성별에 관계없이 남녀 배우가 연기하는 ‘젠더프리’(Gender-Free) 캐스팅, 5명의 배우들이 60여 개의 캐릭터를 소화하는 일인다역은 연극성과 재미를 극대화한다. 배우들은 의상도 갈아입지 않고 그저 이름표를 뗐다 붙였다 하면서 자신의 현재 역할을 알리고, 간단한 소품만으로 알란의 세계여행을 표현해낸다.

세계 지도 모양으로 쌓여 있는 수많은 상자와 서랍들은 알란의 여정에 따라 연도와 나라 이름을 표시하는 기능, 그리고 60여 개 등장 캐릭터의 이름표와 각종 소품들을 수납하는 기능을 한다. 덕분에 관객들은 앉은 자리에서 지구촌의 지난 100년을 여행하게 된다. 작가 요나손은 역사적으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죽은 지난 100년의 역사를 ‘인류 최악의 세기’로 평가하며 소설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을 통해 “그 모든 전쟁과 재난을 건드리되 유머를 가미해 희망도 얘기하고 싶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파란만장한 인생 속에서 발견하는 새로운 삶의 패러다임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에는 두 개의 이야기가 교차되며 펼쳐진다. 하나는 100세 생일날 양로원을 도망친 노인 알란이 벌이는 좌충우돌이고, 또 하나는 그 와중에 전개되는 알란의 지난 100년간의 인생사이다. 알란의 100세 생일을 전후로 각각 20세기와 21세기에 펼쳐진 그의 모험담인 것. 그런데 그 규모나 성격, 질감에 있어 매우 다른 양상으로 그려져 서로 다른 두 세기(20세기 현대사와 그 후의 역사)를 바라보는 작가의 관점을 비춘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어린 시절부터 양로원에 들어가기까지 알란이 살아온 인생은 그야말로 격동의 20세기 현대사라 할 수 있다. 세계 곳곳 치열한 갈등의 현장에서 알란은 스페인의 독재자 프랑코, 미국의 대통령 트루먼, 소련의 스탈린, 중국의 마오쩌둥 등 역사적 거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이념과 사상이 세상을 리드하고, 힘의 논리가 사람들을 지배하던 20세기 역사의 단면을 보여준다. 폭약과 폭탄 전문가로서 활약한 그의 이력 역시 ‘파괴’와 ‘폭력’으로 점철된 현대사를 은유하는 하나의 장치라 볼 수 있다.

한편, 100세 생일을 앞두고 양로원을 도망친 알란은 새로운 모험을 시작하는데, 이 모험의 여정에서 그가 만나는 사람들은 지난 세기에 만난 거물들과는 급이 다르다. 우울증에 걸리기 직전인 무료한 노인, 22년째 졸업을 못하고 있는 만년 대학생, 세상과 동떨어져 살아가는 농가의 주인과 그녀의 코끼리 등 주로 사회의 주류로부터 멀리 떨어진, 지극히 평범하고 소외된 약자들이다. 이들은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서로를 보듬으며 “함께” 하는 즐거움을 추구하는, 따뜻한 연대의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또 다른 삶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팽팽한 긴장의 20세기가 끝난 뒤, 새로운 삶의 패러다임으로 세상을 열어가고자 하는 작가의 바람이 무대에서는 어떤 재미와 감동으로 다가올까.

‘100세 알란’을 연기하는 배우 배해선(왼쪽)과 오용(오른쪽). 원작 소설의 알란은 남성이지만, 연극에서는 성별에 관계없이 여러 배우가 소년, 청년, 중년, 장년, 100세로 나누어 알란을 연기한다.

글. 김주연(연극칼럼니스트)
사진제공. 연극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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