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희의 화가가 그린 최고의 발레 마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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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가 드가 「발레 수업」

‘발레리나 그림’을 이야기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화가는 단연 에드가 드가(Edgar Degas, 1834~1917)다. 그는 파리 오페라 극장을 수도 없이 드나들면서 발레리나들을 그렸다. 공연 장면을 그린 것도 있지만 더 많은 것은 무대 뒤의 모습 즉, 연습 중이거나 대기하는 장면이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가 「발레 수업」인데, 긴 막대기를 든 남자가 바로 낭만주의 프랑스 발레의 가장 중요한 안무가 중 한 사람인 쥘 페로(Jules Perrot, 1810~1892)다.

무대를 휘어잡은 최고의 발레리노

페로는 1830년 20세 때 런던 왕실 극장과 파리 공연계의 상징인 파리 오페라 극장 양쪽에서 거의 동시에 주역으로 데뷔했다. 프랑스는 일찍이 루이 14세 시절부터 발레를 사랑한 나라다. 그래서 대혁명 이전의 왕실 극장을 잇는 파리 오페라 극장은 오페라와 대등한 비중으로 발레단을 운영했고, 그 전통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페로는 데뷔하자마자 관객들을 사로잡았고, 당대 최고의 발레리나 마리 탈리오니(Marie Taglioni, 1804~ 1884)의 파트너가 된다. 발레 애호가로 유명한 낭만주의 작가 테오필 고티에(Théophile Gautier, 1811~1872)는 페로의 다리가 그리스 조각상처럼 완벽한 데다 여성적인 느낌까지 갖고 있다고 묘사했다. 발놀림 또한 너무나 민첩하고 강인해서 탈리오니의 광휘를 가로막기도 했다. 급기야 탈리오니는 페로와 함께 춤추기를 거부했고, 발레리나가 발레리노보다 훨씬 중요시되던 시대였기에 페로는 파리 오페라 극장을 떠나게 된다.

발레 블랑의 정수, <지젤>의 탄생

파리를 벗어난 후로는 유럽 전역이 페로의 무대가 된다. 1834년,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9살 연하의 신동 발레리나 카를로타 그리시(Carlotta Grisi, 1819~1899)를 만난 페로는 그리시를 위한 춤을 만들었고, 함께 춤을 추었다. 1836년, 17살의 어린 그리시는 ‘마담 페로’로 통용되는 등 페로와 공식적인 연인 사이가 되었고,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이듬해 두 사람의 딸까지 태어났다.

그러던 중 1841년 6월, 프랑스 발레를 대표하게 될 <지젤>이 파리 오페라 극장에서 초연된다. 안무는 잔 코랄리(Jean Coralli,1779~1854)로 표시되었지만 타이틀 롤 ‘지젤’을 맡은 그리시의 춤은 모두 페로가 안무했다. 지금은 잔 코랄리와 쥘 페로의 공동 안무로 표기되는 것이 보통이다. 사실 초연 당시의 원형은 알 수 없고 훗날 러시아로 건너가 변형된 안무가 현재 살아남은 것인데, 어디까지가 원형이고 어디부터가 변형된 부분인지 명확하지 않다. 아무튼 <지젤>의 제2막은 이른바 ‘발레 블랑’(백색 발레)을 대표하는 최고의 명장면으로 꼽힌다.

깊은 밤, 남자 주인공 알브레히트는 자기 때문에 쇼크로 죽은 연인 지젤에게 사죄하기 위해 깊은 숲속의 그녀 무덤 앞에 나타난다. 그러나 이곳은 원한을 품고 죽은 처녀 귀신의 무리인 ‘빌리’의 영역이다. 빌리의 우두머리 미르타는 알브레히트가 지쳐 쓰러져 죽을 때까지 춤을 추도록 하는 저주를 내리지만 빌리의 새 일원이 된 지젤이 막아서서 연인의 목숨을 구한다. 초자연적인 분위기와 생사를 넘어선 고귀한 사랑에 숨이 넘어갈 듯한 감동을 선사하는 발레다. 음악은 프랑스 작곡가 아돌프 샤를 아당(Adolphe Charles Adam, 1803~1856)이 작곡했다.

 

<지젤> 1막 중 ‘지젤의 바리아시옹’ (영국 로열 발레단)

 

 

<지젤> 2막 발췌 (파리 오페라 극장 발레단)

영국으로, 러시아로, 다시 프랑스로

이듬해인 1842년, 페로는 런던 왕실 극장의 발레 마스터로 임명되었다. 이때부터 6년간 안무가로서 페로의 전성기가 펼쳐지는데 아쉽게도 이 시기의 대표작 <온딘> (1843), <라 에스메랄다>(1844), <파 드 카트르>(1845)의 안무는 남아 있지 않다. 다만 당대 최고의 발레리나 네 명(마리 탈리오니, 루실 그랑, 카를로타 그리시, 파니 체리토)을 동시에 초청해 무대에 올린 <파 드 카트르>는 워낙 큰 화제를 모았으므로 후대의 안무가들이 나름의 방식으로 복원하여 오늘날에도 공연되곤 한다.

‘파 드 카트르’(Pas de Quatre)란 제목 자체가 ‘4인무’란 뜻이다. 이 중 탈리오니가 가장 유명하고 선배이기도 했으므로 페로는 탈리오니에게 가장 중요한 춤을 주어야 했다. 하지만 다른 발레리나 사이에서 큰 질투와 갈등이 벌어졌다고 한다. 음악은 발레 작곡가로만 이름을 남긴 체자레 푸니(Cesare Pugni, 1802~1870)가 맡았다.

1851년, 페로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향했다. 마린스키 극장의 러시아 황실 발레단을 맡기 위함이었다. 이곳에서 7년간 활동한 페로는 아쉽게도 후대에 기억될 만한 명작을 남기지는 못했다. 무용단의 수준을 높이는 것이 급선무였기에 훈련에 더 많은 비중을 둔 것 같다. 대신 마리우스 프티파(Marius Petipa, 1819~1910)라는 확실한 후계자를 남기고 떠난다. 역시 프랑스 출신으로, 페로보다 먼저 러시아에 진출해 주역 발레리노로 활약하고 있었던 프티파는 페로가 돌아간 후 발레 마스터로 승진하여 거의 반세기동안 황실 발레단을 이끌면서 러시아 발레를 세계 최고의 수준으로 발전시킨다.

페로와 그리시의 관계는 어떻게 되었을까? 페로는 그리시를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불러들였고, 1853년까지 그리시는 그곳에 있었다. 그러나 당시 30대 중반이면 발레리나로서 전성기가 지난 나이였고, 결국 그리시는 딸을 데리고 먼저 프랑스로 돌아갔다. 이로써 두 사람은 결혼하지 못한 채 헤어지고 만다. 이후 페로는 황실 발레단의 러시아 무용수와 늦은 결혼을 한 후 1858년 프랑스로 돌아간다.

 

1845년 영국 런던에서 <파 드 카트르> 공연을 기념하며 제작한 석판화.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 소장)
서 있는 사람이 마리 탈리오니이고, 맨 왼쪽이 카를로타 그리시이다.

‘무희의 화가’ 드가가 그린 페로

프랑스로 돌아온 페로는 특정 극장에 속하지 않고 이곳저곳에서 객원 지도를 이어갔다. 파리 오페라 극장이 좋은 자리를 제안했어야 마땅하지만, 페로가 너무 거물이라 불편해 객원으로만 불렀던 모양이다. 그럼에도 페로가 파리 오페라 극장 발레단을 자주 지도했기에 드가의 「발레 수업」이 그려졌을 것이다. 드가와 페로는 개인적인 친분도 있었다는데, 같은 극장에 드나들고 계속 마주치면서 생긴 관계였으리라.

드가의 「발레 수업」에 그려진 페로를 다시 들여다보자. 긴 막대기를 짚고 서서 발레리나들을 가르치고 있다. 페로의 하얗게 센 머리와 벗겨진 앞이마를 보면 노인이 명백하니 그냥 지팡이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짚고 다니는 지팡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길다. 공들여 깎은 비싼 막대기로는 보이지 않지만, 어쨌든 대단한 권위가 느껴진다. 연습 때 바닥을 쳐서 박자를 맞추는 용도였다고 한다.

「발레 수업」에서 주목할 부분은, 의외로 소녀들을 예쁘게 그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제대로 포즈를 잡고 있는 발레리나는 페로가 바라보는 정면의 두 명 정도이고, 대부분이 연습에 지친 듯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있거나 심지어 피아노 위에 올라앉아 등을 긁고 있다. 실제 상황일까?

드가는 넓은 의미에서 ‘인상주의자’로 불리지만 부친이 프랑스로 귀화한 이탈리아 은행 가문 출신답게 섬세한 필치의 이탈리아 회화에 관심이 많았다. 또한 데생의 귀 재였다. 적어도 인물 묘사에 관한 한 사실적 화풍이란 뜻 이다. 게다가 여성을 좋아하지 않았다. 부친을 영혼의 동 반자처럼 여겼지만 일찍 세상을 떠난 미국 출신 모친을 그리워했다는 얘기는 거의 전하지 않는다. 그렇게 많은 발레리나를 그리면서도 그들을 실제 이상으로 아름답게 묘사하거나 연정을 품지 않았다. 왜 여성을 기피했는가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다. 드가는 자신의 사생활 노출을 지극히 꺼렸고, 예술가는 응당 그래야 한다고 믿었다.

 

에드가 드가, 「발레 수업」, 1873~1876년 (오르세 미술관 소장)

잊혀버린 소녀 발레리나, 마리 반 괴템

드가는 ‘무희의 화가’로 불리지만, 발레리나를 너무 추하게 묘사했다는 이유로 큰 비난에 직면한 경우도 있었다. 그림이 아니라, 1881년 여섯 번째 인상파전에 자신의 첫 조소 작품으로 출품한 「14살의 작은 무희」가 바로 그것이었다. 곧바로 비평가들의 혹평을 받았고, 관객들은 어이가 없다는 듯 작품 가까이 다가가지도 않았다.

원래 작품은 사람의 피부색과 유사한 밀랍으로 빚은 인형에 가발을 씌우고, 무용복을 입히고, 천으로 된 무용화를 신긴 것이었다. 그런데 그 체형과 자세, 그리고 표정이 당시 이상적으로 생각한 여성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여성미의 상징이라는 발레리나를 모델로 한 것인데도 말이다. 이런 지독한 사실성은 관객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물론 지금은 드가의 목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품으로 꼽힐 뿐 아니라, 드가 사후에 청동 복제품이 28~29개나 제작되어 세계 각지로 퍼져 나갔지만 말이다.

조각상의 모델은 마리 반 괴템(Marie van Goethem, 1865~?)이다. 1865년 파리에서 가난한 벨기에 이민자의 딸로 태어난 그녀는 재단사였던 아버지가 죽자 두 자매와 함께 파리 오페라 극장 발레학교에 입학했고 단역으로 공연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생활에 여유가 없는 세탁부였던 모친은 딸들을 예술가로 키우기보다는 생계의 수단으로 이용하고자 했다. 그래서 화가의 모델이 될 것을 강요했고 심지어 도둑질을 시키기도 했으며, 아마 비밀스런 매춘에도 나서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

마리는 발레단 연습에 불참하는 일이 잦아 결국 쫓겨났는데, 자주 결석한 이유는 절도죄로 체포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후 마리의 삶은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19세기 말의 프랑스쯤이면 개인에 대한 기록 시스템이 거의 완비된 상황임에도 말이다. 직업, 결혼 여부는 물론 언제 죽었는지도 모른다.

 

에드가 드가, 「14살의 작은 무희」, 1878~1881년 (워싱턴 국립 미술관 소장)

 

 

그런데 조각상의 모델이 마리 반 괴템이라고 분명하게 규명된 것은 그리 오래 전의 일이 아니다. 파리 국립 오페라 극장의 문화국 책임자 마르티네 카하네(Martine Kahane)가 추적한 끝에 찾아낸 것이다. 파리 국립 오페라 발레단 예술감독 브리지트 르페브르(Brigitte Lefévre)는 파리 오페라 극장의 역사와도 관계된 이 이야기에 관심을 갖고, 발레 작품으로 만들기 위해 카하네에게 스토리를 구상하도록 요청했다. 그리고, 오랜 협력자인 파트리스 바르(Patrice Bart, 1945~)에게 안무를 의뢰하여 2003년 <드가의 작은 무희>(La Petite danseuse de Degas)라는 제목으로 발표하였다.

1880년대의 파리와 그 극장가 풍경으로 우리를 안내한다는 점, 그런 가운데 완전히 잊혔던 소녀의 존재를 되살려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작품이다. 프랑스의 드니 르바이앙(Denis Levaillant, 1952~)이 작곡한 음악은 전통적인 발레 스타일과 많이 다르지만 전혀 어렵지 않다.

 

파리 국립 오페라 발레단 <드가의 작은 무희>(2010) 공연 가운데 ‘드가’가 ‘마리’를 모델로 데생하는 장면

 

<드가의 작은 무희> 중 발레 연습실 장면

글. 유형종(음악·무용 칼럼니스트)

음악 칼럼니스트이자 공연 해설가인 필자 유형종은 음악 공동체 ‘무지크바움’과 고양아람누리 등의 문화예술기관, 그리고 대학 등에서 고전음악과 오페라, 발레를 강의하고 있다.
‘명화 속 비밀과 클래식 음악’은 명화 속에서 짚어낸 예술가들의 비밀스럽고 흥미로운 이야기에 클래식 음악 이야기를 더해 눈과 귀를 모두 즐겁게 하는 코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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