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오페라로 현대 사회의 병폐를 짚어내다

미술관에서 세계 8개 도시 투어를!
2021년 8월 24일
거리예술가들이 이끄는 일상 여행
2021년 8월 24일
52021년 8월 24일
명연출로 다시 만나는 오페라 ②
로랑 펠리 연출의 훔퍼딩크 오페라 <헨젤과 그레텔>

프랑스 연출가 로랑 펠리는 2008년 영국의 글라인드본 오페라 페스티벌에서 ‘가족 오페라’의 명작 <헨젤과 그레텔>을 공연했다. 그림 형제의 동화로 유명한 <헨젤과 그레델>은 독일이 가난하던 시절의 사회상을 반영한 이야기였지만 펠리는 현대의 사회문제를 부각시켜 재해석했다.

바그너적 기법을 구사한 독일 오페라의 걸작

오페라 <헨젤과 그레텔>

독일의 작곡가 엥겔베르트 훔퍼딩크(Engelbert Humperdinck, 1854~1921)의 대표작 <헨젤과 그레텔>(1893)은 그림 형제가 채집한 민담을 바탕으로 훔퍼딩크의 누이 아델하이트 베테(Adelheit Wette)가 그 대본을 썼다. 훔퍼딩크가 조카들을 위해 인형극 노래 네 곡을 만든 바 있는데, 그 곡들이 계기가 돼 그의 누이가 직접 대본을 집필했다.             

                          

훔퍼딩크의 오페라 중 현재 공연되는 것은 사실상 <헨젤과 그레텔>뿐이지만, 운이 좋다거나 동화를 다룬 오페라여서 유명해진 것은 아니다. 음악적으로도 독일 오페라의 정통 계보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걸작이다.

우선 동화에 어울리는 쉽고 명쾌한 선율이 지배한다. 민요도 차용했다. 줄거리가 재미있고 훈훈하게 마무리되는 점은 가족 오페라로 적합하다. 극 전체를 거의 여성 가수로 공연 가능하다는 점도 특이하다. 10대 소년인 헨젤은 ‘바지 역’(여자가 남장한 역)이므로 헨젤과 그레텔의 부친을 제외하면 모두 여성으로 구성할 수 있다. 다만 실제 공연에서는 마녀를 테너에게 맡겨 남녀 성부의 균형을 다소간 맞추기도 한다.                

음악적으로 가장 중요한 점은 바그너적인 기법을 구사한다는 점이다. 우선 라이트모티브(유도동기)의 사용을 꼽을 수 있는데, 가장 중요한 ‘빗자루를 탄 마녀의 동기’만으로도 음악적 통일성과 극적 분위기를 충분히 고조시킨다.                        

관현악이 거의 끊어지지 않고 쭉 이어지는 것도 바그너의 무한선율과 닮았다. 덕분에 독일 음악 특유의 탄탄한 구성미를 갖추고 있다. 풍부한 관현악 효과도 주목할 만하다. 4대의 호른과 3대의 트럼본으로 후기낭만주의의 확대된 악기용법을 잘 보여준다. 이 밖에도 반음계적 화성 등 바그너에게 영향 받은 바가 크다. 

로랑 펠리 연출 오페라 <헨젤과 그레텔>. 글라인드본 오페라 페스티벌에서 2008년 초연 버전을 2010년에 재공연한 사진이다.

어두운 사회상이 숨어 있는

어른들에게도 흥미로운 동화

1막의 공간은 가난한 집이다. 오빠 헨젤은 빗자루를, 여동생 그레텔은 양말을 만들고 있다. 일에 싫증을 느낀 그레텔은 오빠에게 춤을 가르친다. 귀가한 엄마는 아이들에게 화를 내고, 남매는 피해 다니다가 유일한 먹을거리인 우유병을 깨뜨려버린다. 엄마는 산딸기라도 따오라며 아이들을 쫓아낸다. 빗자루를 다 팔고 기분 좋게 돌아온 아빠는 아이들이 숲에 갔다는 말에 얼굴이 파래진다. 숲에 늙은 마녀가 산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2막의 공간은 숲속이다. 너무 깊숙이 들어온 남매는 해가 저물자 돌아가는 길을 찾을 수도 없다.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잠의 요정이 모래를 뿌리자 아이들은 곧 잠에 빠져 천사들을 만나는 꿈을 꾼다.

3막이 되면 남매는 아침을 맞는다. 그레텔은 오빠와 똑같은 꿈을 꾸었음을 알게 된다. 그때 이슬이 걷히면서 과자의 집이 드러난다. 남매는 천사의 선물이라며 집을 뜯어 먹다가 마녀에게 붙잡힌다. 과자로 구워지려는 위기일발의 상황에서, 마녀의 주문을 외워둔 그레텔은 묶인 오빠를 풀어준다. 그러고는 마녀를 속여 아궁이 속으로 힘껏 밀어버린다. 아궁이가 폭발하자 마법이 풀리고 그동안 사라졌던 많은 아이들이 나타난다. 남매는 그곳으로 달려온 부모와 재회한다.

원래 그림 형제의 동화는 어두운 민담을 바꿔놓은 것이다. 독일이 가난하던 시절, 먹을 것이 없어 부모들이 자식을 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는데, 이 동화도 그런 얘기를 다루었다. 한편으론 마녀 사냥을 빗댄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중세에는 소외된 여인들이 마녀라는 누명을 쓰고 화형당하곤 했는데, 이 동화에서 마녀가 아궁이에서 죽는 것 역시 화형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 밖에 소년들을 납치해 살해한 중세 프랑스 귀족의 실화에서 비롯되었다는 설도 있다. 이처럼 <헨젤과 그레텔>에는 어두운 사회상이 숨어 있어서 어른을 위한 동화로도 흥미롭다.

로랑 펠리 연출 오페라 <헨젤과 그레텔>(2010)

현대적 재해석이 돋보이는

로랑 펠리 연출의 글라인드본 실황

파리 출신의 로랑 펠리(Laurent Pelly, 1962~ )는 18세에 이미 자기 극단을 만든 프랑스 연출가이다. (최근에는 자신이 직접 담당하기도 하는) 튀는 무대와 의상, 풍자적인 해석으로 극의 아기자기한 묘미를 한껏 살려내면서도 이면에 숨은 심각함까지 드러내는 연출로 큰 인기를 끌었다. 원래는 프랑스 희극 오페라에서 솜씨를 발휘했지만 지금은 희가극을 넘어섰고, 다른 나라 레퍼토리에서도 솜씨를 보이고 있다. 독일 오페라 <헨젤과 그레텔>의 탁월한 재해석도 그의 성공적 레퍼토리 확장을 입증한 예다.

1막 : 헨젤과 그레텔이 사는 골판지 박스로 만든 집

 

2막 : 잎이 다 떨어져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나무, 인간에 의해 오염된 숲

 


3막 : 가공식품 가득한 슈퍼마켓으로 설정한 
과자의 집

1막 : 현대 자본주의의 그림자, 극빈층의 삶

서곡이 연주될 때 글라인드본 오페라 하우스의 출연자 대기실로 허름한 골판지 박스가 배달된다. 아무도 받지 않으려 하지만 헨젤과 그레텔 남매만은 기꺼이 받아 들고 좋아한다. 그런 선물이라도 받고 싶을 정도로 가진 것 없는 아이들이다.

서곡이 끝나고 골판지 모양으로 제작된 첫 막이 오르면 바로 그 골판지 박스가 아이들이 사는 집으로 바뀌어 있다. 도대체 얼마나 찢어지게 가난한 것일까? 너무 허술하게 지어진 집이어서 춤추던 아이들이 넘어져 부딪히면 벽이 무너져 내릴 정도다. 그렇다. 현대의 자본주의는 전체적인 삶의 질은 향상시켰을지언정 빈부 격차는 해소하지 못했다. 이 순간에도 부모가 사랑하는 자식의 기본 교육조차 포기할 정도의 극빈층은 여전히 존재하는 것이다.

2막 : 환경 선진국도 피해갈 수 없는 환경파괴의 실상

2막 숲속 장면은 울창한 숲 대신 잎이 다 떨어져 앙상한 가지만 남고, 바닥엔 쓰레기가 가득할 정도로 인간에 의해 오염된 숲이다. 독일 사람들은 숲을 사랑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남서부의 거대한 산림지대 슈바르츠발트(Schwarzwald, ‘검은 숲’이란 뜻)는 나뭇잎이 검은 것이 아니라 숲이 너무 울창한 탓에 대낮에도 밤처럼 어둡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그런 신비로운 숲에서 비현실적인 것을 동경하는 독일 낭만주의가 탄생했고, 세계적으로 유별난 자연 보호의 개념이 싹터 성장했다. 그런데 휴양시설이 들어서고, 숲속으로 길을 내고, 식당이 성업하면서 환경이 파괴되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펠리는 그런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다.

3막 : 비로소 되살아나는 푸른 숲

3막은 더욱 압권이다. 그렇게 황폐화된 현대의 숲에서 맞는 아침.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과자의 집도 우리가 상상했던 것과 전혀 다르게 기발하다. 가공식품으로 가득한 슈퍼마켓인 것이다. 오늘날의 아이들이 가장 원하는 과자의 집은 대형할인점의 과자 또는 식품 코너가 맞지 않을까.

헨젤과 그레텔이 슈퍼마켓 주인인 살찐 마녀를 물리치자 그동안 인스턴트식품 탓에 잔뜩 살이 오른 뚱보 아이들이 거대한 상품 진열대 뒤에서 나타난다. 그리고 슈퍼마켓을 영구 폐쇄한다는 안내 간판을 세우자 비로소 숲이 다시 살아나 푸른 모습을 되찾는다.

이런 식의 해석이 의미를 갖는 이유는 무엇일까? 오늘날 옛 동화들이 우리가 어렸을 때만큼 잘 읽히지 않는 것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는 21세기 사회상, 또는 가치관과는 동떨어진 상황을 묘사한 경우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펠리는 옛 이야기의 교훈을 통렬하고 멋들어지게 현대사회의 병폐로 치환했다.

물론 슈퍼마켓 폐쇄와 숲의 부활을 직접 연결시키는 식의 마무리는 다소 논리의 비약이 없지 않겠지만 전체적으로 명쾌하고, 유머러스하고, 설득력 있게 그려냄으로써 지나치게 급진적이거나 투쟁적으로 보이기도 하는 환경단체들의 입장과도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고 있다.

추천영상

2008년 글라인드본 오페라 페스티벌 실황

지휘 오노 카즈시
연주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출연 헨젤 : 제니퍼 할러웨이(메조소프라노), 그레텔 : 아드리아나 쿠체로바(소프라노), 마녀 : 볼프강 아블린저-스페르하케(테너), 엄마 : 이름가르트 빌스마이어(소프라노), 아빠 : 클라우스 쿠틀러(바리톤)

포디엄에 선 오노 카즈시는 일본인 지휘자다. 오자와 세이지가 암 투병 중인 가운데 일본이 가장 내세울 만한 현역 거장의 한 사람인데, 풍성하기 이를 데 없는 오케스트라의 진면목을 한껏 잘 살렸다. 미국 메조소프라노 제니퍼 할러웨이와 슬로바키아 소프라노 아드리아나 쿠체로바의 남매 조합도 환상적이다. 하지만 3막에 등장하는 마녀 역의 독일 테너 볼프강 아블린저-스페르하케가 가장 압권이다. 원래 알토가 부르는 마녀 역에 테너를 쓰는 가장 큰 이유는 마귀할멈 이미지 대신 희극적인 캐릭터를 부여하기 위함인데, 이를 완벽하게 살려냈다.

글. 유형종(음악·무용 칼럼니스트)

‘명연출로 다시 만나는 오페라’는 현대적이고 도전적인 연출로 관객들에게 신선한 감흥을 안겨준 오페라 프로덕션을 유형종 칼럼니스트가 엄선해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