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웠던 20세기를 향한 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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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으로 떠나는 역사 산책 ⑦
톰 스토파드의 <록앤롤>과 체코 현대사

체코슬로바키아 출신의 영국 작가 톰 스토파드의 연극 <록앤롤>은 1968년 ‘프라하의 봄’부터 1989년 ‘벨벳 혁명’까지 약 20여 년간 이어진 격동의 세월을 차근차근 풀어낸 작품이다. ‘연극으로 쓴 체코의 현대사’라 해도 과언이 아닌 이 작품은, 체코 민주화 과정에서의 역사적 사건들을 당대를 뜨겁게 달구었던 록 밴드의 음악과 예술의 자유를 꿈꾸는 젊은이들의 이야기 속에서 전개하고 있어 ‘음악으로 본 정치사’라고도 할 수 있다.

자유의 염원, ‘프라하의 봄’

1968년 8월, 여느 날과 똑같이 출근길에 나선 프라하의 시민들은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거대한 탱크의 행렬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프라하 시내, 도심 한복판을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떤 선전포고도 경고도 없이 갑작스레 들이닥친 이 탱크 부대의 소속은 바르샤바 조약기구(WTO),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에 맞서 소련을 중심으로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체결한 군사 동맹 조약기구였다.

난데없는 이 탱크 침공과 진압은 바로 그해 1월, 체코슬로바키아의 총리로 선출된 알렉산데르 둡체크(Alexander Dubček, 1921~1992)가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표방하면서 검열 폐지 및 언론, 출판, 집회의 자유를 보장하는 등 독자적인 온건 사회주의 정책을 고집한 데 대한 소련의 무력 경고이자 응징이었던 것이다.

남의 수도를 무작정 밀고 들어온 소련군의 탱크에 맞서 시민들은 비폭력 시위로 대응했으나, 결국 무자비한 진압에 의해 도시는 피로 얼룩지고 수많은 사상자가 생겨났다. 당시 외신들이 이 소식을 전하면서 “과연 프라하의 봄은 올 것인가?”라고 헤드라인을 뽑은 데서 유래해 1968년도의 이 혁명은 ‘프라하의 봄’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결국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는 실패로 돌아가고 이후 체코는 ‘정상화’라는 이름 아래 다시 엄격한 사회주의 정부의 관리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하지만 ‘프라하의 봄’은 이후 수많은 체코1)의 문학, 연극, 영화 등 예술에 광범위하고 지속적인 영향을 주게 된다.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 1929~ )의 대표작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비롯해 바츨라프 하벨(Václav Havel, 1936~2011)의 희곡, 이르지 멘젤(Jiri Menzel, 1938~2020)의 영화, 보후밀 흐라발(Bohumil Hrabal, 1914~1997)의 소설 등 많은 체코의 예술작품이 이 시기를 직간접적인 배경으로 그려내고 있다.

두 세계에 걸친 작가의 자전적 요소

체코 출신의 영국 작가 톰 스토파드(Tom Stoppard, 1937~ )의 연극 <록앤롤>2)도 이러한 체코 현대사와 깊은 연관을 지니고 있다. 이 작품은 1968년 ‘프라하의 봄’에서 시작해 1989년 바츨라프 하벨3)을 중심으로 한 반체제연합 시민포럼이 공산 독재 체재를 무너뜨린 ‘벨벳 혁명’까지 약 20여 년간 이어진 격동의 세월을 한 해 한 해 짚어가며 차근차근 풀어내고 있어, 연극으로 쓴 체코 현대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이를 거시적인 정치 담론으로 그려내기보다는 도어즈와 핑크 플로이드, 벨벳 언더그라운드와 딥 퍼플, 플라스틱 피플 오브 더 유니버스 등 당대를 뜨겁게 달구었던 록 밴드의 음악과 함께, 예술의 자유를 꿈꾸는 젊은이들의 이야기 속에 풀어나가고 있어 음악으로 정리한 정치사라고도 볼 수 있는 작품이다.

<록앤롤>에는 작가 톰 스토파드의 자전적인 요소가 많이 들어 있다. 이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영국 케임브리지와 체코 프라하를 오가며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주인공 얀은 두 세계에 걸쳐 있는 지식인의 형상으로 그려진다.

물론 톰 스토파드 자신은 어린 나이에 가족과 함께 영국으로 건너가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평생 영국의 극작가로 살아왔지만, 자신의 조국인 체코의 정치, 사회적 상황에 꾸준히 관심을 가졌고 실제로 바츨라프 하벨과 같은 체코 민주화 인사들 및 예술가들과도 깊은 교류를 이어가기도 했다. 이렇듯 체코 민주화 운동에 대한 작가의 꾸준한 관심과 직간접적인 참여의식이 작품 안에서도 은연중에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한 록앤롤 마니아의 삶과 선택

극 중 주인공 얀은 정치에는 그다지 큰 관심이 없는 지식인 청년이다. 그는 캠브리지에서 마르크스주의자인 막스 교수 밑에서 수학하다가 ‘프라하의 봄’ 사건을 계기로 체코로 돌아간다. 하지만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생각 같은 것은 전혀 하지 않은 채, 그저 가족과 친구들 곁에 돌아온 것으로 만족해한다.

이런 얀에게는 유일한 취미가 하나 있는데, 바로 록앤롤 음악이다. 체코에 돌아올 때도 가방 전체를 LP 판으로 가득 채울 정도로 록앤롤에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는 얀은, 바로 그 LP판 때문에 입국심사에서부터 체코 당국의 감시와 주의를 받게 된다. 당시 엄격한 공산주의 체제로 돌아간 체코 정부의 눈에 영국의 록 음악은 적대 세력의 불온한 문화였고, 저항과 자유의 정신을 노래하는 록이라는 장르 자체도 사회 체제를 위협하는 위험한 음악이었던 것이다.

처음에 얀은 ‘정상화’ 정책으로 점차 더 엄격해지는 사회 체제에 대해 그다지 큰 걱정을 하지 않으며, 반정부 서명 운동에 참여하라는 친구의 권유에도 서명을 거부한다. 하지만 점점 자유로운 발언과 생각의 자유를 잃고, 이 체제하에서는 어떤 자유로운 예술도 허용되지 않음을 깨달은 뒤 자발적으로 서명 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감옥에서 돌아온 얀이 산산조각 나버린 레코드판들을 발견하는 모습은 바로 이 체제에 대한 얀의 믿음과 기대가 완전히 깨져버린 것을 은유하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록앤롤>은 이렇듯 그저 음악을 사랑했을 뿐인 한 록앤롤 마니아가 예술의 자유에 대한 국가의 통제 속에서 서서히 체제에 저항하는 인물로 변해가는 과정을 음악과 드라마 속에 그려내고 있다.

일러스트레이션 · 정유나

허구 속 실제, ‘77헌장’과 ‘존 레논 벽’

물론 <록앤롤>에 등장하는 주요 캐릭터와 사건들은 허구를 바탕으로 했지만, 이 작품에는 체코 민주화 운동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역사적 문서와 실제 공간이 등장한다. 바로 ‘77헌장’과 ‘존 레논 벽’이 그것이다.

극 중 얀의 친구 페르디난드가 가지고 다니며 서명을 받는 문서는 실제 체코 민주화 운동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77헌장’을 암시한다. 극작가이자 민주화 운동가 바츨라프 하벨이 발기인으로 서명한 이 문서는 표현의 자유와 인권을 주장하면서 체코 정부가 국제 인권 조항을 준수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77헌장’은 정부가 문서 원문을 압수했음에도 불구하고, 지하 출판을 통해 복사본이 비밀리에 배포되었고, 『르 몽드』 『뉴욕 타임즈』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자이퉁』 등 서구의 신문에도 실리면서 체코의 민주화 운동을 널리 알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문서다.

또한 극의 후반부에 배경으로 등장하는 ‘존 레논 벽’ 역시 실재하는 프라하의 역사적 명소 중 하나다. 1980년 존 레논이 비극적으로 세상을 떠나자 그를 기리기 위해 프라하의 젊은이들이 평화를 염원하는 존 레논의 노래 가사를 벽에다 적기 시작했고, 이는 곧 자유를 열망하는 메시지와 반정부 구호로 이어졌다.

정부는 벽 위에 새로 페인트칠을 해서 이들의 흔적을 없애려 했지만, 다음날이 되면 또 다시 누군가가 노랫말과 구호를 몰래 써놓고 가면서 이 평범한 벽은 하나의 상징적인 장소가 되었다.

지금은 수많은 여행객들이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모여드는 관광명소지만 당시에는 수많은 체코 젊은이들이 자유의 염원을 담아 방문하는 성지와 같은 곳이었고, 바로 이러한 장소의 역사적 맥락이 작품 속에서도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전략)
우리가 77헌장을 구상하고 오늘 그 제정을 공표하는 것은 이러한 상호 책임과 국민으로서의 참여의지, 또한 그 결과에 대한 신뢰감에 입각해서이다.

77헌장은 우리 모두의 자유로운 공유물이며, 배타적이지 않고 개방적이다.

법률의 효력을 갖는 두 국제협약이 인정하는 권리, 헬싱키 회담에서 최종 확인된 권리, 전쟁과 폭력과 사회적·정신적 억압에 반대하는 수많은 국제적 문서들에 의한 보장된 권리, 유엔 인권선언이 종합적으로 규정한 바 있는 인간의 권리들이, 세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에서도 존중되게 하려는 의지만 있으면, 견해와 신념과 직업에 관계없이 누구라도 참여가 가능하다.

77헌장은 자신과 직장에 대해 이상을 갖고 그 이상의 미래 운명에 대해 우려를 함께하는 사람들의 우정과 연대라는 토대 위에 펼쳐진다.

77헌장은 조직체가 아니므로 규약이 있을 리 없고, 항구적 기관이 아니므로 정해진 가입조건이 있을 리도 없다. 다만 원칙에 찬성하는 이들이 각자 자기 업무에 종사하면서 지지하기만 하면 된다.
(후략)

– ‘77헌장’ 가운데 일부, <청중>(바츨라프 하벨 작, 오세곤 역, 예니, 2000년)의 부록에서 발췌

치열했던 20세기의 초상들

이 작품에는 주인공 얀을 중심으로 그의 영국 스승인 막스·엘레나 부부와 그들의 딸 에스메, 얀의 체코 친구들인 렌카와 페르디난드, 마그다, 그리고 얀과 막스를 감시하는 비밀경찰 밀란 등 상당히 많은 수의 인물이 등장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 중 누구 한 사람도 서로에게 동조하는 사람이 없고, 모두가 각자의 신념과 열정에 따라 살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같은 공산주의 추종자이면서도 막스와 스티븐의 견해가 다르고, 같은 고전 전공자이면서도 엘레나와 렌카의 해석이 다르며, 똑같이 록 음악을 좋아하고 자유를 신봉하는 체코 청년이면서도 얀과 페르디난드의 입장이 다르다.

1968년 프라하의 봄부터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된 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들은 매 장면 서로의 의견에 반대하고 비판하고 충돌하고 갈등한다. 하지만 작가는 이들 중 누구의 의견에도 옳고 그름의 잣대를 들이대지 않는다. <록앤롤>이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결국 누가 옳았고 어떤 이념이 성공했고 실패했는지에 대한 판단이 아니라, 그 격동의 시절 속에서 각자의 이상을 믿고 인생을 바쳤던 그들 모두의 선택, 그 뜨겁고도 순수한 열정 자체인 것이다.

그러한 맥락에서 이 작품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 즉 소련의 탱크가 프라하를 점령한 상황에서도 여전히 ‘모두가 평등하게 잘 사는 세상’의 꿈을 버릴 수 없었던 마르크스주의자 막스 교수나 공산주의공산주의 독재 권력에 맞서 자유로운 사회를 되찾고자 했던 민주주의자 페르디난드, 안락한 가정환경을 뒤로 한 채 거리로 나가 ‘러브 앤 피스’를 외치며 히피 공동체에 참여했던 에스메, 병으로 자신의 몸이 점점 무너져가는 와중에도 고전학에 대한 열정을 불태웠던 인문학자 엘레나, 그리고 감옥에 있건 빵집에 있건 언제나 자유롭게 록 음악을 듣는 세상을 꿈꾸며 살았던 얀에 이르기까지, 이들 모두는 프로타고니스트(protagonist)와 안타고니스트(antagonist)가 아니라 각자 다른 방식으로 더 나은 세상을 꿈꾸었던, 뜨겁고 치열했던 20세기의 초상들이다.

저항의 상징, 록앤롤

수많은 음악 장르 중 록앤롤이 이 작품 속에서 중요한 모티프이자 소재로 쓰이고 있는 것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이어진다. 이른바 반(反)주류 음악, 젊음의 저항 음악의 상징으로 손꼽히는 록앤롤은 1960년대와 70년대를 거쳐 80년대에 이르기까지 사회·문화 전반에 걸쳐 폭발적인 영향력을 끼치며 한 시대를 풍미한 그야말로 ‘20세기의 음악’이었다.

서로 다른 색깔과 비전을 지닌 밴드들이 등장해 각자의 목소리로 노래했지만, 이들의 노래 저변에는 근원적인 자유로움과 뜨거운 열정, 그리고 저항이라는 공통적인 요소가 내재해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 속 록앤롤은 체코 젊은이들의 정신적 이상향이자 민주화 운동의 저항적 요소로 기능할 뿐만 아니라, 20세기라는 뜨거웠던 시대에 대한 하나의 찬가처럼 불리고 있는 것이다.

글. 김주연(연극평론가)

‘연극으로 떠나는 역사 산책’은 세계 연극사에서 손꼽히는 희곡들을 통해 역사적 사실과 그 사실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 즉, 시대와 사회를 바라보는 새로운 해석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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